영화 <헤이는> 촬영 현장
“선배님, 좀 더 다급하게 넘겨주세요.”
“이게 잘 안 넘어가. 손가락에 침 묻혀볼까?”
“그럼 침 묻히고 한 컷, 안 묻히고 한 컷 갈게요
12월 8일 오후 8시 부산 동구 수정동 재건부산교회. 영화 〈헤이는〉의 최용석 감독이 ‘김 전도사’ 역을 맡은 배우 임형국 씨에게 연기 주문을 하는 중이었다. 검정색 겨울코트를 정갈하게 차려입은 김 전도사가 굳은 얼굴로 교회에 들어선 뒤 ‘새 신자 카드’를 확인하는 장면이다. 이야기 흐름상 김 전도사가 다급하게 카드를 넘겨야 하는데 실내가 건조한 탓인지 종이가 손가락에 붙지 않아 배우가 애를 먹고 있었다. 손가락에 침도 묻혀보고, 투명 테이프를 붙여볼까 고민도 하며 여러 테이크를 찍은 끝에 어떤 ‘도구(?)’도 쓰지 않은 컷이 최종선택 됐다. 김 전도사의 점잖은 성격에 더 어울리는 까닭인 듯했다.
〈헤이는〉은 최 감독이 각본·연출을 맡은 네 번째 장편영화이다. 경성대 출신인 최 감독은 부산지역 대표 독립영화 감독으로 2006년 〈제외될 수 없는〉, 2011년 〈이방인들〉, 2015년 〈다른 밤 다른 목소리〉를 선보이며 자신만의 작품 세계를 인정받았다. 최근작 〈다른 밤 다른 목소리〉는 지난 10월 개최된 부산국제영화제(BIFF)의 ‘한국영화의 오늘-비전’ 부문에 초청돼 시네필들의 주목을 받기도 했다
최 감독은 2015년 부산영상위원회의 ‘부산지역 영화제작 지원사업’에 선정되면서 4~5년에 한 작품씩 내놓던 ‘올림픽 감독’을 탈피했다. <다른 밤 다른 목소리>에 이어 올해만 두 작품째 찍고 있는 것이다. 이번 사업에 총 4팀이 선정됐는데, <헤이는>은 지원금 총액 2억2000만 원 중 최대 금액인 1억 원을 배정받았다. 당시 다섯 명의 심사위원은 만장일치로 〈헤이는〉 프로젝트를 선정했다. 부산영상위원회는 결과를 공지하며 “기독교라는 종교적 배경과 다문화 가족이 결합된 이야기가 부산이라는 공간에서 펼쳐졌을 때 나타나는 이질감과 충돌이 새로운 그림을 만들어낼 것이라는 기대감을 갖게 한다”고 이유를 밝혔다.
부산영상위원회의 말처럼 〈헤이는〉은 교회와 다문화가정을 배경으로 이야기를 펼친다. 살인으로 10년간 복역한 뒤 베트남으로 떠난 주인공 ‘석이’는 그곳에서 아버지가 한국인인 베트남 여성 ‘투엉’을 만나 결혼하고 아들을 낳는다. 아내와 아들을 위해 고향 부산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한 석이는 귀향하는 배 안에서 만난 베트남인의 소개로 영도의 조선소에서 일을 시작한다. 한편 목사 안수식을 얼마 남겨두지 않은 김 전도사는 우연히 이주노동자 축제에서 동생 석이 가족을 목격하고 당황한다. 이후 다시 만난 석이와 김 전도사는 아픈 기억이 깃든 교회로 돌아오고 그곳에서 서서히 자신들의 처참한 과거를 만나게 된다.
이방인의 삶에 대해 예리한 감각을 드러냈던 최 감독. 이번에는 우리사회에서 범죄를 저지른 뒤 이방인이 된 주인공과 그 주변을 들여다본다. 그는 “처음에는 갑작스럽게 극단적인 행동을 한 사람이 이 사회에 다시 돌아온다면 용인받고 살아갈 수 있을까 하는 궁금증에서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했다. 극단적인 사건이 벌어진 이후 엇갈린 삶을 산 두 형제가 다시 만나 정상적인 삶을 회복할 수 있을까. 시나리오를 수정하다 보니 지금은 형제간의 결핍·콤플렉스, 종교, 다문화에 대한 이야기로까지 확장됐다”고 말했다. 형제간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라 혹시 자전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쓴 것은 아닐지 궁금했다. 하지만 최 감독은 누나만 한 명 둬 영화 속 주인공과는 다른 상황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어떤 계기로 이런 이야기를 떠올리게 된 걸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정상적으로 살아가는 것 같지만 우리 주변에는 보이지 않는 결핍이나 아픔을 가진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 타인을 내밀하게 관찰하면 행복하고 정상적인 삶을 살고 있다기보다 외부의 시선 때문에 자신의 결핍이나 아픔을 숨기고 사는 사람이 많은 것 같다. 혹은 극단적인 상황에 적응돼 자신의 아픔이 아픔이라는 것조차 모르고 사는 경우도 있다.”
석이와 김 전도사가 등장하는 배경은 주로 초량동 상해거리, 영도 조선소, 수정동 산복도로, 부산항국제여객터미널 등 부산의 원도심 지역이다. 기자가 찾아간 날도 도시철도 1호선 초량역에서 10분 이상 걸어야 하는 산복도로에 위치한 교회에서 촬영이 진행되고 있었다. 그렇지만 단지 부산 출신 감독이 만드는 영화라 부산을 배경으로 삼는 건 아니다. 영화촬영지로서 부산이 갖고 있는 매력을 <헤이는>은 최대한 활용하고 있다. 최 감독은 “과거에 어떤 일을 겪었는지 알 수 없는 인물들이 이 사회에서 방황하고 부유하는 감정을 부산이라는 도시가 잘 보여줄 수 있는 것 같다. 부산은 항구를 끼고 있어 들고 나는 것이 자연스러운 도시다. 이방인이 자연스럽게 섞여 살기에 적당한 공간”이라고 설명했다.
부산이기에, 영화의 큰 축인 다문화가정의 모습도 자연스럽게 녹일 수 있다. 부산은 외부에서 유입된 이방인이 전국 어느 곳보다 많다. 이 때문에 러시아인, 일본인, 화교 등 이주민들이 어느 도시보다 자연스럽게 섞여 살아갈 수 있는 공간이다. 최 감독은 이 같은 공간에서 살아가는 다문화 가정 아이들이 겪는 갈등에 대해 드러내고 싶다고 한다. “한국사회에서 일상화 된 갈등을 이주민을 통해 드러낸다면 그 모순들이 더 극명하게 설명되지 않을까”라는 것이다. 보통 영화나 다큐멘터리에서는 이주민이나 다문화가정 아이들이 우리사회에서 ‘핍박’당하는 모습이 자주 그려진다. 하지만 이번 영화에서는 그런 모습보다 다문화가정 구성원들이 자연스러운 삶을 살아가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담을 예정이다.
특히 부산의 원도심은 최 감독이 영화배경으로 좋아하는 장소이다. 화면 안에 ‘시간의 결’이 보여 매력적이라고 한다. 초량동 재건부산교회도 시간의 결이 잘 나타나는 장소 중 한 군데이다. “요즘 지어진 교회는 외부만 봐서는 교회인지 일반 빌딩인지 알 수가 없다. 여러 교회를 물색하다 이곳을 찾았는데, 마치 성당 같은 외부가 마음에 들었다. 시간을 오래 간직한 느낌이다.” 실제로 영화의 배경이 된 교회는 하얀색 타일로 외벽을 장식한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세월의 때가 묻은 하얀 타일과 아치 모양의 창문이 요즘 교회와는 달리 고즈넉한 분위기를 풍겼다.
최 감독의 영화에는 종종 교회가 등장한다. 감독 자신이 기독교 신자로 교회의 내부사정에 대해 잘 알고 있기 때문인 듯 했다. 이번 영화에서는 기독교를 바라보는 부정적인 시선이 드러난다. ‘모태신앙’이라는 그가 가족 내에서 곤란한 상황에 처하진 않을까. “부모님은 이런 내용인지 모르신다. (웃음) 기독교에 대한 비판이라기보다 시스템에 대한 비판이다. 한국 교회는 신에 대한 믿음보다는 사업에 관심이 더 많은 것 같다. 김 전도사가 신도들과 갈등을 겪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교회의 사업화, 대형화로 인해 믿음·신뢰 같은 본질보다 외적인 것에 휘둘릴 수밖에 없는 현실을 자연스럽게 드러내고 싶다.”
이날 주연 배우들 중에서 유일하게 볼 수 있었던 ‘김 전도사’ 역의 임형국 씨는 어쩐지 낯이 익었다. 연출팀에 살짝 물어보니 독립영화로는 대박을 터뜨린 <한여름의 판타지아>(2015)의 주인공이라고 귀띔했다. <한여름의 판타지아>의 남자 주인공은 일본인인데…하던 찰나에 이 영화가 크게 2부로 나눠져 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임형국 씨는 1부에서 영화감독 ‘태훈’ 역으로 출연했다. 실제로 본 그는 연기를 할 때는 ‘차가운 도시 남자’ 같은 이미지를 풍겼지만, 컷 소리와 함께 스탭들과 농담을 주고받는 ‘훈남’으로 변했다.
최 감독은 배우들을 거의 직접 캐스팅한다. 영화를 보며 인상 깊은 배우를 기억해 놓기도 하고 아는 감독들에게 추천 받기도 한다. 최 감독은 임형국 씨를 많은 작품에서 봐왔다. 〈헤이는〉 속의 김 전도사는 불온하면서도 이중성을 지닌 이미지인데, 실제로 임형국 씨가 웃을 때는 한없이 순수하고 무표정일 때는 건조한 느낌이 있어 역할과 잘 맞아 보였다고 한다. ‘석이’ 역의 허준석 씨는 부산 출신이다. 상업영화와 드라마에서 자주 볼 수 있다. 요즘은 SBS 월화드라마 <육룡이 나르샤>
(2015)에서 악역으로 출연하는데, 얼굴에 표정이 잘 드러나지 않지만 미소를 지었을 때의 힘과 감정선이 좋아서 캐스팅이 되었다고.
그런데 이날 신도 역할을 하는 보조출연자들은 부산 사투리를 썼지만, 주인공 김 김전도사는 ‘서울말’을 쓰는 게 이상했다. 김 전도사가 고향을 떠나 서울에서 유학한 설정일까. 최 감독은 “고민하다 사투리를 뺐다. 배우들이 다 서울 출신이다. 사투리를 쓰면 연기가 작위적이고 자연스럽지 않게 된다. 리얼리티보다 좋은 연기를 보여주기로 했다. 석이의 아내는 한국인 아버지와 베트남인 어머니를 둔 혼혈인인데 한국어를 쓴다. 마찬가지로 베트남어를 쓸 경우 배우의 연기가 부자연스러워지지 않을까 염려스러웠다”고 사정을 설명했다.
이번 영화는 최 감독의 이전 영화보다 ‘서사’가 살아있다는 점이 특징이다. 제작규모도 총 1억2000만 원으로 가장 크다. “이전에는 공간성에 방점을 뒀는데 이번에는 사건과 이야기를 구성하는 데 시간을 많이 할애했다. 이전에는 공간에 이야기를 맞추고, 공간에 인물을 넣은 뒤 이야기를 덧붙이는 경우가 많았다. 이번에는 사건과 이야기 안에 인물들의 캐릭터를 넣었다. 서사에 대한 고민을 이전 작품보다 많이 했다”
서사에 대한 고민이 많아진 까닭이 궁금했다. “갈수록 독립영화, 예술영화 찍기가 힘들다. 영화를 계속 찍고 싶은 감독이라면 대중과 소통 지점을 찾아야 한다. 개인적인 이야기보다는 캐릭터와 사건을 통해 설명하는 작품을 대중이 더 선호한다. 독립영화이지만 좀 더 보편적인 이야기를 해야 대중을 설득할 수 있겠다고 판단했다.” 〈한공주〉(2014)나 〈한여름의 판타지아〉 등이 독립영화임에도 대중의 사랑을 받는 모습을 지켜본 영향도 있다고 한다. 그렇지만 “이번 영화도 그다지 대중적이진 않다”고 웃었다.
<헤이는>을 찍으며 어려운 점이 무엇인지 물었다. “제작비 이야기는 이제 지겹죠”하며 인력 문제를 먼저 꺼냈다. “영화라는 게 시나리오 감독만 있다고 찍을 수 있는 게 아니다. 촬영, 기술, 사운드, 분장 등 전문가 집단이 모여 함께 만들어야 한다. 그런데 지역에는 영화인력이 풍부하지 않아 스탭들을 서울에서 모셔 와야 하니 어려운 점이 많다. 이번 영화의 스탭들은 거의 모교인 경성대 선후배들이다. 서울에서 활동하다 잠깐 도와주러 내려왔다. 동문들이 아니면 불가능한 작업이다.” 어려운 점을 이야기하며 예산 문제를 언급하지 않고 넘어가기는 힘들었다. “촬영 회차가 20여 회에 그친다. 찍을 건 많은데 찍을 시간은 없으니 꾸역꾸역 몰아넣느라고 제대로 잠도 못 잔다.”
마지막으로 ‘헤이는’이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물어봤다. 좀처럼 들어보지 못한 단어인지라, ‘헤이야’라고 한 차례 실수를 한 뒤였다. “윤동주 시인의 ‘별 헤는 밤’에서 따왔다. 별을 헨다는 것은 어떤 명확한 목표가 있는 행동은 아니지 않나. 희망, 기대를 안고 하나 둘 헬 뿐이다. 별을 헤는 행동이 이 영화의 인물들이 가지는 정서와 맞닿아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제목으로 정했다. 단어 자체가 주는 따뜻한 느낌도 좋았다.”
이번 영화는 12월 3일 크랭크인 했다. 제작팀은 12월 말 혹은 1월 중 촬영을 마무리 한다는 계획이다. 촬영은 총 22회차로 예정돼 있다. 제작사인 ‘이유필름’의 손민식 프로듀서는 “내년 10월 부산국제영화제(BIFF) 상영을 목표로 제작하고 있다. 2017년 개봉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2017년 부산시민은 물론 전국의 시네필이 집과 가까운 영화관에서 <헤이는>을 볼 수 있기를 바라며, 별이 뜬 밤 교회를 빠져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