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기득권의 시스템을, 그 관계와 규범을 깰 수 있는 것일까?
“공동의 삶에서 ‘죽음(살해)이라는 높이’에 자신을 붙잡아 둘 필요가 있다…공동체는 죽음이라는 강렬함의 높이에서만 유지되며, 위험과 함께 나타나는 기묘한 장엄을 망각할 때 와해된다.” (조르쥬 바타이유)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하지 못한’단다. 이를테면, ‘외부는 없다’는, 그 모든 첨단의 이론들에 곁붙는 후렴구를 닮은 오만하고 자가당착적인 선언이다. 시쳇말로 그 놈이—좋은 놈이든 나쁜 놈이든, 혹은 이상한 놈이 든—그 놈이라는 뜻일까? 쿠데타-체계는 그 자체로 하나의 완결된 세계이며, 그 세계를 개벽(開闢)하는 혁명 없이 승계한 후계들의 도덕에 의해 부정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고쳐 말하자면, 그 도덕은 이미 그 속이 생태적으로 오염된 것으로서, 마치 말로써 말을 넘어설 수가 없는 것처럼 자식이 자신을 낳은 아버지를 처벌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이러나저러나 체계 속에 들붙어 기식하는 제도로써 그 체계의 원죄를 정죄할 수 없다는 것이라면, 대체 누가 ‘외부 없는 체계의 보나파르트’를 처벌할 수 있을까? 누가 기득권의 시스템을, 그 관계와 규범을 깰 수 있는 것일까?
1. 깨기(breaking): 어기기(violating)와 깨(우)기(waking)
바타이유의 단상에 기대어, 기존의 관례나 규범을 깨는 주체가 그 관례나 규범을 내재화해서 이를 생활의 문법으로 유지해가는 ‘우리’인지, 아니면 이러한 문법에 생소한 낯선 타자인지를 묻는 것으로 논의를 시작해보자. ‘깨는 자’는, 진정으로 깰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 우선 두 종류의 ‘깨기 (breaking)’를 떠올려 볼 수 있겠다. 그 하나는 어기기(violating)로서 깨기이며, 나머지는 깨(우)기(waking)로서 깨기이다. 당연히 어기기는 게임의 규칙(rules of the game)에 내재하는 행위이며, 따라서 그 게임과 규칙을 전제하는 바탕 위에서만 가능해진다. 비트겐쉬타인의 유명한 명제처럼 ‘모든 것을 의심할 수는 없’으며, 아니, 의심하기 위해서라도, 마치 문(門)의 경첩 같은 기본 규칙들을 인정해야만 하는 것이다. 쉬운 예를 들자면, 오직 규칙들을 내재화한 선수들만이 시합 중에 ‘어길’수 있을 뿐인데, 이와 달리 비록 시합 중에 난입한 군중의 행위가 제아무리 파괴적이라고 하더라도 이를 놓고 ‘어겼다’고 할 수는 없는 법이다.
깨는 것이 깨(우)는 것일 때에는 ‘엎다(overthrow)’라는 의미로 전유할 수 있다. 그것은 기존의 판(champ/field)에서 벗어나는 것으로서, 그 판을 아예 인정하지 않거나 인정할 수 없는 경우에 해당하는 행위인 셈인데, 전술한 용어로 맞춰 옮기자면 게임의 규칙에 외재적(extrinsic)이다. 자신이 순치되어 있던 규칙의 네트워크에 대해서, 각성과 일탈이 동시 병발한다고 할까. <밀양>(이창동, 2007)의 신애는 나르시시즘적 영웅주의 속에서 상상적으로 동일시한 신(神)의 사랑[愛]을, 자신의 아들을 죽인 살인자를 ‘용서’함으로써 현시하려고 한다. 그러나 교도소에서 잠시 면회한 그 가해자는 (신애와 마찬가지로 역시 자신의 ‘마음’속 에서) 이미 신에게 제 멋대로 용서를 받은 후였고, 이 치명적 어긋남의 후유증으로 인해 면회를 마친 신애는 실신(失神)하고 마는데, 이를테면, 바로 이 실신이야말로 그간 신(神)애가 빠져있던 신(神)의 장(場)에서 벗어나는 것이며, 그 동일시의 꿈에서 깨어나는 것이고, 그리고 새로운 시작을 암시하면서 낡은 판을 엎어버리는 것이다.

<26년>(2012) 포스터
1-1. 암살은 어김인가 깨움인가
암살도 일종의 깨는 행위라면, 그것은 어기는 것일까, 깨우고 엎는 것일까, 혹은 이것들과 는 어긋나는 제 3의 무엇일까? 전술했듯이 어기는 것은 게임의 규칙에 내재하는 행위로서 이를 전제하는 바탕 위에서만 가능해지므로, 만약 암살이 그러하다면 원칙적으로 암살의 행위 그 자체를 정당화하기가 어려워진다. 이 경우의 암살은 고작 불법적인 범죄로 저락할 뿐이며, 대개의 경우는 사원(私 怨)의 앙갚음이므로, 암살의 주체화, 즉 ‘안중근’, 혹은 심지어 김재규 등에서 보는 것과 같은 암살을 통한(영웅주의적·나르시시즘적) 주체화는 불가능하다.
그러면 암살은 기성의 판을 깨우고 뒤엎어버리는 행위일 수 있을까? 그래서 당대적 체계를 인정하지 않은 채 외부에서 일방적으로 침입해 들어오는 사건적 후과를 지니는 것일까? 그러므로 비록 그 행위가 기존의 체계를 변혁할 수는 없더라도, 적어도 그 외부적 성분으로 인해 동시대의 체계내적 논리에 의해서는 결코 정당하게 해명되거나 평가될 수 없는 보편적 초월성을 지니는 것일까? 안중근이나 김재규의 경우와 같이, (지사적 결기에 의해서든, 혹은 일종의 허위의식에 의해서든, 혹은 그 어떠한 성격이든) 암살자가 스스로를 기존체계의 외부에 상징적으로 위치시키더라도, 그 외부성, 다시 말해서 그 미래적·보편적 정당성을 강변해야 하는 자리는 이미 오염된 기득권의 법과 도덕의 체계일 수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암살이라는 수행성—-결코 ‘의사(義士)의 대의’만일 수 없는—은 묘한 양가성을 띨 수밖에 없는데, 그것은 당대의 체계를 깨우고 뒤엎어버리려는 깨기를 행하면서도 동시에 그 취지를 얻거나 유세하기 위해서는 바로 그 체계의 제도적 한계 속에 스스로, 어느 정도, 포박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26년>(2012)
1-2. 암살은 완결성에 부합되지 않는다
박정희를 죽인 뒤에 제대로 된 논변 한 마디를 내걸지도 못한 채 박정희의 법에 의해 처형당한 박정희 체제의 하수인 김재규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토 히로부미를 죽인 뒤에 <동양평화론>을 쓰고, 자신의 행위가 대의의 확신에 의한 결행임을 법정을 통해 당당히 밝힌 안중근마저도 엄밀히 말하자면 체계의 외부성은 아니다. (동학당의 박해에 나섰던 그의 전력이나, 일본의 선의에 호소하는 그의 행적이 이런 점에서 참조가 될 듯) 암살은 그 행위로서 온전히 직립(直立)하는 경우에만 체계의 외부에 서게 되는데, 마치 선물의 불가능성(데리다)이나 용서의 불가능성에 대한 논의의 구조가 잘 보여주듯이, 결국 그 어떠한 변설도, 상징적 항의도 역설적으로 그 행위가 갖는 완결성—‘자살은 완벽한 행위’(라캉)라고 할 때의 그 완벽성—을 훼손시키기 때문이다.
2. 26년, 빛-고을(光州) 주체들의 이야기
사회주의 유토피아론들에서 외려 더 선명히 찾아볼 수 있는 것처럼 완결된 체계 속에라도 증상이 없을 수는 없는 법이다. 조근현 감독의 <26년>(2012) 은 1980년 광주의 상처가 ‘29만원의 전두환’이라는 조롱거리 역사를 뚫고 귀환하는 증상에 관한 이야기다. 무릇 증상은 상처의 이야기를 억압한 탓에 (신음이나 한숨과 같은) 이야기의 상처가 드러나는 곳이므로 이 영화-이야기는 여러 곡절을 거치고 여러 표현을 얻으며 이 증상을 투명하게 만들어냄으로써 우리 시대의 괴물을 향해 암살의 빛[光]을 던지는 빛-고을(光州) 주체들의 이야기가 된다.
2-1. ‘의욕’으로 강조한 ‘암살의 윤리’
<26년>은 전두환을 죽여 복수설치하려는 상처받은 평민들의 ‘의욕’으로 가득한 영화다. 테크닉이나 드라마가 아닌 ‘의욕’을 강조한 점은, ‘암살의 윤리’라는 차원에서는 차라리 성공적으로 보인다. 할리우드 영화라면 이런 경우에 꼭 과시하고야 마는 화려하고 정치한 테크닉도 없는데다, 암살의 주체들이 상처를 역사적으로 승계한 여러 층의 서민들이라는 사실은 바로 이 ‘의욕의 무죄’를 설복하려는 의미있는 배경이 된다.
2-3. (불)행한 (비)현실화
전두환과 그 패거리들이 언죽번죽 나대고 있는 이상, 광주의 5월이 번듯한 이름을 얻고 망월동이 성역화된 일은 내 눈에는 한갓 우스개요 역사에 대한 조롱일 뿐이다. 나는 지난 십여 년 동안 몇 차례의 기고에서 전두환의 암살을 상상하였으므로, <26년>은 내겐 기이한 조우이자 (불)행한 (비)현실화일 수밖 에 없다. <26년>은 상처받은 서민들의 원망을 끝내 충족시켜주지 않는데, 이는 영화나 예술 따위의 상징적인 미봉으로써 현실을 봉합하려는 회피책을 거 부한 채, 이를테면, 증상이 계속되도록 배려(?)함으로써 우리 서민들의 상상이 실제로, 기어코, 이루어지도록 돕고자 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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