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기획, 한국영화잡지 흥망사( 興亡史)

특집기획, 한국영화잡지 흥망사( 興亡史)

<키노><필름2.0>를 거쳐 <씨네21>까지 세 곳을 거친 주성철 기자가 명멸했던 영화잡지의 흥망사를 들춰 본다. (편집자)


지난 3월, <씨네21>과 함께 ‘유이’했던 영화잡지의 하나인 <무비위크>가 폐간되자 많은 영화인들이 안타까워 하며 깊은 소회를 드러냈다. 1990년대 후반을 지나 2000년대 초반에 이르기까지 영화 관객층과 독자층을 공유하며 ‘한국영화 르네상스’의 내적 기반 구실을 했던 영화 잡지 전성기는 진작 저물었지만, 이제 영화전문 종이잡지가 하나 남았다는 사실은 그 느낌이 다르다는 것이다. 인터넷과 온라인이 정보와 광고의 흐름을 장악하고 세상을 재편하는 마당에 영화잡지도 이 쓰나 미를 피해갈 수는 없다. <키노><필름2.0>를 거쳐 <씨네21>까지 세 곳을 거친 주성철 기자가 명멸했던 영화잡지의 흥망사를 들춰본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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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많던 영화잡지는 모두 어디로 갔을까. 지난 5년여의 기간 동안 영화잡지는 <씨네21>과 <무비위크>, 그렇게 2개의 매체가 공존하고 있었다. 세계 어디서도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영화 ‘전문 주간지’가 2개나 있었던 것. 하지만 따지고 보면 그 역시 거듭된 영화잡지 폐간의 종착지였다. 각각 1984년과 1989년에 창간된 월간지 <스크린>과 <로드쇼>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고, <씨네21>과 비슷한 시기에 창간되어 마니아들의 열광적인 지지를 얻었던 월간지 <키노>와 <프리미어>가 생명을 다했으며, 지난 2008년 폐간한 주간지 <필름2.0>까지 더 하면 1990년대 말과 2000년대 초에 이르기까지 무려 3개의 주간지와 4개의 월간지가 동시에 경쟁하기도 했었다. 그러니까 시사 주간지 시장과 견줘도 이상하지 않을 영화잡지의 화려한 전성기가 있었다. 하지만 매체 환경의 변화, 광고 시장의 침체와 맞물려 수익 구조의 불균형 속에 영화잡지들은 하나둘씩 사라져갔다. 특히 주간 단위 와이드 릴리즈 방식의 극장문화가 안착한 상황에서 월간지는 그 속보성을 따라갈 수 없었다. 2개의 주간지가 그나마 꽤 오랜 기간 공존하며 수익성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그런데 <무비위크> 역시 지난 3월 571호를 끝으로 발행을 종료했다. 영화인들 사이에서 ‘영화 전문지 중 가장 오래 살아남을 것’이라고 얘기될 정도로, 가장 ‘대중적’인 영화잡지로 평가받던 <무비위크>였기에 그 충격은 컸다. 하지만 이후 알려진 바에 따르면, 편집장을 제외한 대부분의 기자들이 4월부터 (원래 모기업이기도 한) 중앙일보사가 발행하는 영화잡지 매거진 <M>으로 옮겨간 것으로 보인다. 말하자면 폐간이라기보다는 ‘통합 재발행’으로 보는 것이 적절할 듯하다. 그렇다 해도 그 충격의 여파가 해소되는 것은 아니다. 수지타산을 맞추는 것 자체가 힘든 상황에서, 가장 그에 가까운 형태로 존립을 유지하던 매체마저 ‘손질’이 불가피했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비단 경제적 요구로 인한 것 만은 아닐 것이다. 영화잡지를 둘러싼 시장 여건도 바뀌었고 그를 소화하는 대중들의 영화문화도 바뀌었다. 그것은 결코 따로 있지 않다. 한국의 영화잡지는 과연 어디로 가고 있는가.

한국 영화잡지의 등장과 ‘영화 문화’의 태동1_3
한국에서 영화잡지가 생기기 이전, 영화를 소개하고 평하며 ‘공유’하는 문화는 아마도 1980년대를 전후한 정영일 평론가 로부터 거슬러 올라가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영화잡지가 영화평론지와 다른 결정적인 이유는 곧 개봉할 영화를 소개한다는 의미가 가장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 어떤 영화잡지도 피해 갈 수 없는 운명이다. 그는 영화평론가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미술관이나 박물관의 큐레이터 같은 존재였다. 물론 그전에도 신문에서 영화는 소개되고 있었고 여러 다른 평론가들이 문학이 아닌 영화로 눈길을 돌리고 있었다. 하지만 영화는 ‘가십’이나 ‘뉴스’였지 ‘리뷰’라는 개념이 희박할 때 였다. 그런데 팬들 사이에서 특유의 굵은 검은색 뿔테 안경과 ‘마지막 로맨티스트’라는 별명으로 유명한 정영일은, 전문 방송인이 아닌 그만의 화법으로 <KBS 명화극장>을 예고 방송 했다. 지금의 시선으로 보자면 분량이 긴 것도 학술적인 것도 아니었으나, 마치 트레일러처럼 영화의 일부분을 짧게 소개해주며 뭔가 영화에 ‘문화적’ 향취를 불어넣었다. <하이눈 High Noon>(1952), <닥터 지바고Doctor Zhivago>(1965),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One Flew over the Cuckoo’s Nest>(1975), <록키Rocky>(1976) 같은 영화들을 그의 해설로 들으면서 감독과 배우가 궁금했다. 단지 극장에 손수건 들고 들어가 눈물을 훔치고, 액션과 호러 등 장르영화를 오락거리로 즐기던 것을 넘어 영화는 그의 소개를 따라 ‘더 알고 싶은 그 무엇’이 된 것이다. “놓치면 후회하실 겁니다!”라는 말은 바 로 그를 대표하는 문장이 됐다.

당시 영화를 향한 갈증을 해소하는 방법은 바로 일본판 <스크린>과 <로드쇼>를 불법적 경로를 통해 구해 보는 일이었다. 국내에 개봉하지 않는 영화들은 물론, 스타들의 화려한 사진과 기사가 가득한 ‘보물’이었다. 그런 번거로움을 일시에 해소하게 된 사건은 바로 1984년 3월, 과거 <한국일보> 편집국장을 지내기도 했던 당시 조세형 국회의원이 주변의 도움으로 ‘창인사’를 설립해 <스크린> 1호를 낸 일이다. 바로 한국 최초의 영화잡지였고 그 표지 모델은 브룩 쉴즈였다. 제호와 구성, 표지모델 선정에서부터 어딘가 ‘외산’ 잡지의 냄새가 가득 풍겼지만 그것은 당시의 영화문화에 따른 것이다. 왜냐하면, 한국 영화 점유율이 지금과는 달리 굉장히 미미하던 시절이었다. 말하자면, 안성기, 박중훈, 강수연, 장미희, 이영하 정도 외에는 표지모델로 다룰 수 있는 한국배우 자체가 없었다.

하지만 일간지 외에 한국영화를 전문적으로 다루는 매체가 등장한 것만은 분명했다. 당시 <스크린>의 기자로 있었고 이후 <키노>의 편집장까지 지낸 이연호 평론가의 얘기에 따르면 “한국영화 촬영현장에 기자가 방문하여 감독이나 배우, 혹은 스태프를 인터뷰하고 취재하는 일 자체가 무척 신선하고 혁명적인 일”이었다. 그처럼 “자신의 영화를 누군가가 ‘팔로우’하고 있다는 인식은 영화의 완성도 자체에 여러모로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고 할 수 있으니, 1990년대 중반 이후 찾아온 한국영화 전성기의 단서를 찾아 올라가자면 ‘영화잡지의 등장’을 결코 빼놓고 얘기할 수 없다. 바로 한 편의 영화가 제작발표회와 함께 지속적으로 대중과 소통하게 된 것이다. 그렇게 <스크린>이 즉각적으로 성공을 거두면서 ‘영화의 꿈’을 키웠던 수많은 젊은이들이 우리말로 된 영화 이야기를 소화하기 시작했다. <스크린>은 일종의 ‘독자기자’ 제도를 뒀는데, 현재 명필름 심재명 대표와 배우 등이 독자기자로 활동하며 자신의 사진과 함께 일종의 영화기사를 기고했다. 말하자면, 모두 영화잡지를 통해 그렇게 성장했다.

그로부터 5년 뒤 창간한 <로드쇼>는 독주하던 <스크린>과는 다른 스타일로 도전장을 던졌다. 얼핏 <씨네21>과 <무비위크>가 경쟁하던 최근의 몇 년간을 떠올리게 하지만 그 차원은 전혀 달랐다. 홍콩영화의 전성기와 더불어 비디오 시장과 광고 시장이 기하급수적으로 성장했고, 경제적 생존 측면에서 굳이 경쟁하는 구도가 아니어도 존립할 수 있는 풍족한 여건이 마련된 것이었다. <로드쇼>는 ‘책 속의 책’이나 다름없는 ‘도씨에(dossier)’라는 꼭지를 통해 보다 전문적 영화지식을 갈구했던 독자들의 열광적 반응을 끌어냈다. 불어를 차용한 꼭지명에서 보듯 당시 영화 마니아들 사이에서 회자되던 프랑스 영화잡지 <까이에 뒤 시네마> 같은 ‘품격’을 담아내기에 충분했다. 미국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감독이자 현재 영상원 교수인 김홍준 평론가가 ‘구회영’이라는 필명으로 도씨에를 써나갔고, 그 내용은 <영화에 대해 알고 싶은 두세 가지 것들>이라는 책으로도 나와 베스트셀러 반열에 올랐다. 잘 다뤄지지 않던 제3세계 영화나 아시아영화도 집중적으로 소개했고 ‘컬트’나 ‘뉴웨이브’, 혹은 ‘미장센’이나 ‘시네아스트’라는 표현이 오르내렸다. 문학이나 음악, 혹은 미술과 비교해 영화를 향유하는 사람들끼리의 집단의식을 구축하는 진지이기도 했다. 그러한 태도는 이후 <키노>로 이어졌으며 어쩌면 그를 통해 ‘영화문화’라는 표현이 자리 잡게 됐는지도 모른다. 정성일이 얘기하는 “우리 잡지를 선택한 독자들과의 연대감”이 바로 영화잡지의 중요한 덕목 중 하나가 됐다.

영화잡지, 한국 영화 성장의 동반자

중요한 것은 <스크린>과 <로드쇼>가 아니더라도 당시는 잡지의 전성시대였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당시 <하이틴>이나 <주니어> 같은 잡지도 종종 리뷰보다는 ‘스타’가 중심이 된 영화 잡지의 성격을 띠기도 했다. 비슷한 시기 <비디오 무비>나 <비디오 플라자> 같은 백과사전식 가이드 잡지도 있었다. 워낙 비디오 시장이 성장한 탓에 신작 비디오 소개가 중심이었지만, 최신 영화계 소식과 발 빠른 취재도 잊지 않았다. 이후에는 비디오에서 DVD로 옮겨가 <DVD2.0><DVD21> 같은 DVD 전문 잡지도 여럿 공존했으니, ‘영화전문지’라는 개념을 보다 확장하자면 사실 10개 이상의 잡지가 동시에 각자의 자리를 차지 하고 있었다. 비록 단명하긴 했지만 타블로이드 형식의 <영화 저널>과 격주간으로 발행된 <시네필>도 <씨네21>과 <키노>가 등장하기 이전 선명한 존재감을 남긴 영화잡지들이었다. 그렇게 ‘문화의 시대’라 불리는 1990년대가 찾아왔다.

드디어 1995년 주간지인 <씨네21>과 월간지인 <키노>와 <프리미어>, 그렇게 3개의 잡지가 창간한다. 기존에 존재하던 <스크린> 등에 더해 ‘영화잡지 춘추전국시대’라는 표현도 어색하지 않게 사용됐다. 이 중 <씨네21>과 <키노>는 과거 <스크린>과 <로드쇼>의 경쟁구도를 느끼게 했는데, 그 사이에는 결정적인 차이점이 있다. <씨네21>과 <필름2.0>의 창간 멤버이기도 한 김영진 평론가는 바로 “한국 배우들을 표지 모델로 내세운 점”이라고 말한다. <씨네21>은 이병헌, 채시라, 김갑수, 이혜은을 비롯 여러 한국감독까지 더해 마치 스탠딩 파티를 하듯 한국 영화인들을 배치한 표지 사진을 찍었고 <키노> 는 한국영화의 상징적 존재라고 할 수 있는 강수연을 단독 표지 모델로 내세웠다. “여전히 외국영화의 점유율이 높은 상황에서, 다른 신문도 아닌 <한겨레신문>이 모체였던 <씨네21>이 한국 영화인들을 표지 모델로 내세운 건 신선한 발상이지만 한편으로 무척이나 위험한 모험이었다.”는 것이다. 어쩌면 다른 문화잡지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단순한 소개나 리뷰, 혹은 사후 평론을 넘어 ‘한국 영화산업과 함께 간다’는 동지의식이 깊게 자리한 것이다. 그것이 바로 당시 달라진 한국 영화잡지의 새로운 꼴이었다.

반면, 독자들과의 연대의식을 중시한 <키노>는 마니아층과의 적극적인 교류를 시도했다. ‘모니터 기자’ 제도를 통해 직접적인 소통에 나섰고 그들이 만든 잡지를 부록처럼 제공하기도 했다. 또한 신입 기자 채용 공고에는 모 기자의 칸영화제 취재사진을 첨부하며 ‘내년에는 이 자리에 당신을 모시고 싶습니다.’라는 문구를 넣기도 했다. 말하자면, 그런 식의 소통이 가능하던 시대였다. 그렇게 <씨네21>과 <키노>는 승승장구했다 . ‘<씨네21>이 한겨레를 먹여 살린다.’는 말이나 ‘<키노>의 저패니메이션 특집호가 2만 부나 팔렸다.’는 식의 얘기도 공공연하게 돌았으니 그 파급력은 어마어마했다. 1998년 <로드쇼>가 문을 닫긴 했지만 같은 해 최초의 영화 무가지인 <네가>가 창간했고, 이후 2000년에는 <씨네버스>와 <필름2.0>이 창간하며 그 ‘파이’는 엄청나게 커 보였다. 직접적인 연관성을 증명할 자료는 없지만, 한국영화의 중흥기 역시 그렇게 찾아왔다. 하지만 그게 마지막이었다.

2000년대 들어 영화잡지의 존립은 위태로워지게 됐다. 공교롭게도 <쉬리>(1999)와 <공동경비구역 JSA>(2000)가 한국영화 흥행기록을 새로이 써나가던 바로 그 시기였다. 월간지는 사라져갔고 온라인 매체가 기하급수적으로 늘게 됐다. 2003 년 <키노>가 사라지고, 모기업은 같지만 그 자리를 전혀 성격이 다른 온라인 매체인 <엔키노>가 차지한 것이 그 상징적인 예다. 하지만 그 <엔키노> 역시 얼마안가 자취를 감췄으니, 영화잡지 혹은 영화매체 자체가 이제는 인터넷 포털 사이트에 모든 것을 넘겨준 형국이라 보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한국영화 점유율의 상승 곡선과 영화잡지의 생명력이 반비례하는 이 상황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영화문화의 확산과 한국영화산업과의 공존, 그 두 가지 화두를 부여안고 한국의 영화잡지는 성장해왔다. 모든 것을 ‘광고 시장의 침체’ 혹은 ‘인쇄 매체의 몰락이라는 세계적 추세’라는 말로 정리하면 간단하지만, 한국의 영화잡지는 ‘전문 주간지’라는 독자적 생존방식에서 보듯 그 태생과 확산 자체가 여타의 나라들과는 사뭇 달랐다. 영화잡지 기자들을 ‘영화인’으로 바라보는 영화계의 태도가 그러할 것이다. 영화잡지 기자들이 이후 언론인으로 남지 않고 영화현장이나 영화제 등 이른바 ‘업계’로 흘러가게 된 비율이 한국만큼 큰 나라도 없다. 가장 아쉬움이 남는 대목이 그것이다. 가장 영화계와 가까웠지만 영화계의 성장과 가장 다른 길을 걷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한국의 영화잡지는 지난 10여 년간 한국영화가 성장하는데 전적으로 숭고한 희생을 한 것이다. 사라져간 이들을 향해 진심으로 고마움을 표현한다면, 바로 그 희생정신이었다고 말하고 싶다.

진짜 한국 최초의 영화주간지, <영화저널>
잡지도 역사다.

1992년 창간, 불꽃같은 한 때의 전성기를 보내고 이듬해 문을 닫은 한국 최초의 영화전문 주간지 <영화저널>. 당시에는 파격적이었던 타블로이드판에 막 영업을 시작했던 편의점과 주요 대학 앞 사회과학 서점을 통해 배포하던 무가지로 한국 ‘영화저널사’에 짧고 강한 한 페이지를 남겼다. 당시 영화계는 물론 문화계 전반과 독자들의 뜨거운 지지를 받았지만 무가지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쓰러졌다. <영화저널>은사회비판적 관점에서의 영화비평을 대중적으로 전파한 최초의 시도로, 한때 한국 영화비평지의 주류였다는 평가는, ‘전설’이거나 ‘야사’가 되고 말았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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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이른 봄에 태어나 1993년 늦은 봄에 사라진 <영화저널>이라는 영화주간지가 있었다. <씨네21>을 한국 최초의 영화주간지로 알고 있는 사람이 많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영화저널>은 1990년 대 초반 한국의 영화에 대한 담론을 아주 강렬하게 대변한 영화주간 지였고 한국 영화지 사상 가장 비타협적이고 전투적인 저널을 지향 했다. 지금도 간혹 이 소박했던 타블로이드 주간지를 기억하는 사람이 있다. 주간지가 다루는 기사의 원형을 제시했던 주간지, <씨네21> 과도 다르고 <FILM2.0>과도 달랐던 주간지, 소위 아마추어리즘의 궁극의 모습을 보여줬던 영화지였다

<영화저널>이 독자의 호응을 받은 이유는 아마도 영화를 보는 새로운 시각을 대중적으로 전파한 최초의 시도였기 때문일 것이다. 인상 비평이 비평의 전부인 양 행세하던 그 시절, 최초로 순수한 의미의 저널비평이란 것을 시작했고 그 비평적 지향점은 다분히 사회비판적인 시각에 입각했다. 물론 그러한 비평은 이전에도 존재했다. <영화 저널>은 그것을 저널의 형태로 널리 알렸을 뿐이다. 당시 <영화저널>은 서울 시내에 주당 평균 3만 부가 뿌려지는 무가지였다.

<영화저널>의 가장 특이한 점은 범영화인이 아닌 사람들이 창간해 한때 한국 영화저널의 주류에 올랐다는 것이다. 영화애호가에 불과 했던 직장인 4명이 1천5백만 원씩 모아서 창간한 <영화저널>은 곧 한국을 대표하는 모든 영화 필진을 수용하는 주간지가 됐다. 아마도 영화계 인맥이나 영화학계의 학맥과는 무관한 외인구단이 창간한 잡지였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리라. 영화평론가 남인영씨와 이정하씨를 시작으로 이효인, 강한섭, 유지나, 김영진, 김지석, 변재란, 김경욱, 전양준 등 당시 떠오르던 30대 초반 평론가 대부분이 필자로 참여했다.

전성기의 <영화저널>은 비공식 발행부수 13만 부를 찍었다. 하지만 잡지사 경영은 계속 어려움을 겪었고 그것을 타개하고자 유가지로 전환했지만 사정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 <영화저널>의 회생을 위한 마지막 시도는 20여 명의 영화평론가와 영화과 교수들이 잡지사를 공동 인수하는 것이었다. 각자 300만 원씩 갹출해 총 6천만 원으로 잡지를 살린다는 아이디어였다. 이용관 교수와 이효인 평론가 가발 벗고 이 일을 적극적으로 추진했으나 결국 이 시도는 성공하지 못했다. 평론가 그룹과 당시 발행인 사이에 불거졌던 잡지회생 자금충당 문제에 대한 이견이 원인이었다. <영화저널>에 몸담았던 기자로는 조종국, 이효래, 장채순, 육미정, 김지영이 있었고 지금은 평론가인 김소영씨가 객원기자로 일했다. 이효인 평론가와 김영진 <FILM2.0> 편집위원이 <영화저널>의 마지막 몇 주를 함께 했다. 현재 영진위 소속인 김혜준씨도 <영화저널>의 회생을 위해 노력한 인물이다. 마지막 발행부수는 2만 부, 정기구독자는 3천5백 명이었다. 폐간 사실이 알려진 후 며칠이 지난 1993년 7월 31일 <한겨레신문>에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렸다.

“ 영화전문 주간지 <영화저널>이 폐간됐다. 지난해 2월 몇 명의 젊은 영화광들의 손에서 창간돼 불과 10개월 만에 발행부수 8만 부의 대중적 전문지로 급성장했던 <영화저널>의 ‘신화’가 잡지사 안팎의 여건 불비를 뛰어넘지 못한 채 무너졌다. <영화저널>은 민간에서 만들어 지령 10호를 넘긴 유일한 주간 영화정보·비평지였다…. 사세가 절정을 이뤘던 이 무렵 <영화저널>의 열독률(리스피아르조사연구소, 92년 12월 25일∼31일)은 서울지역 주간지 시장에서 4.9%로 시사저널과 TV저널까지도 앞질렀다.” 김광철(전 <영화저널> 편집장)

<FILM 2.0> 2001. 12. 11. 격동 18년, 잡지는 계속돼야 한다한국 영화저널의 역사에서 옮겨씀


2_1SCREEN / 스크린

1984년 3월 창간한 한국 영화잡지의 효시. 대중영화 전반은 물론 한국영화 계의 현안을 다루는 영화 전문지이기도 하면서 스타들의 브로마이드 잡지로 도 기능하며 젊은 층을 파고들었다. <로드쇼>가 등장하기까지‘ 국내 유일의 영화잡지’라는 명성을 독점적으로 누렸다‘. 안성기가 인터뷰 끝난 취재기자 를 직접 차를 몰아 집으로 데려다 주고, 신인배우 김혜수가 편집실로 음식을 들고 찾아오는’ 일도 가능하던, 말하자면 영화기자들에게는 그야말로‘ 아름 다운 시절’이었다. 평론가 시절의 박찬욱 감독이 고정적으로 B무비에 대한 글을 기고하기도 했고, 쿠엔틴 타란티노와 인터뷰를 갖기도 했다. 2010년 마 지막 호를 냈다.

2_2ROADSHOW / 로드쇼
1989년 4월 창간한 <로드쇼>는 정성일이라는 존재의 등장과 함께 설명해야 할 것이다‘. 책 속의 책’ 콘셉트의‘ 도씨에’는 당시 영화 마니아들의 갈증을 해 소해주는 일종의 해방구 같은 꼭지였다. 1992년 <로드쇼>를 나온 다음에도 시사월간지 <말>의 영화평, MBC FM의‘ 정은임의 영화음악’ 게스트, <한겨 레신문>의 영화평 등을 통해 한국의‘ 씨네필’이라는 상상적 공동체의 리더가 됐다. 또한 <로드쇼>는 홍콩영화의 전성기와 함께했는데, 기자가 홍콩으로 직 접 취재를 가서 왕가위 감독에게‘ 엿장수 가위’를 들고 사진을 찍게 한 전설의 일화도 있다. 창간과 동시에“ 10년 뒤 창간호를 1억에 사겠습니다.”라는 대대 적인 홍보를 펼쳤지만 결국 10년을 채우지 못하고 문을 닫았다

2_3씨네21
1995년 4월 한겨레신문사가 창간한 최초의 주간 영화지다. 1대 편집장은 당 시 <한겨레신문> 문화부 기자로 일하던 조선희가 맡았으며, 창간 1호 특집부 터‘ 누가 한국영화계를 움직이는가’라는 기사를 내세우는 등 이전 영화잡지 들과 달리 한국영화를 그 중심에 놓았다‘. 한국영화파워 50’ 등도 같은 맥락 이며 업계 동향과 뉴스에 발 빠른 접근과 영향력 있는 평론으로, 단숨에 한 국 영화잡지를 대표하는 이름이 됐다. 조선희, 허문영, 남동철 등 전임 편 집장과 김영진, 이상용, 심영섭, 황진미 등 <씨네21>이 배출한 기자와 평론 가들이 각계에서 활동하고 있다. 2003년 8월 한겨레신문사로부터 분사해 (주)씨네21 법인을 꾸렸으며 최근 900호를 냈다.

2_4KINO / 키노
<로드쇼> 편집장이었던 정성일, <스크린> 편집장이었던 이연호를 주축으로 1995 년 5월‘ 100년을 기다려온 그 잡지가 온다’는 도발적인 카피와 함께 창간했다. <키 노>에 대해 정성일은 한 특집기사의 소개 글을 통해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집단 명사 키노. 1995년 5월에 창간되어 이제까지 (두 번을 거르고) 67권의 책을 만들었 다. 많은 전사자를 냈으며, 새로운 희생양들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매년 1월 호에 편집부의 그 해 10 베스트 영화를 선정하여 공식적인 견해를 밝히면서, 동지들 이라는 이름으로 독자들의 베스트 10영화를 만들어 함께 소개한다. 언제나 인터뷰 를 최상의 영화 소개라고 믿고 있으며, 우리들의 이데올로기는 우정이며 최고의 미 학은 작가주의라고 믿는다.” 2003년 99호를 마지막으로 더 이상 발간되지 않았다.

2_5PREMIERE / 프리미어
1995년 12월 국내 최초의 라이선스 영화잡지로 시작했다. <스크린> 편집장 출신인 김홍숙 부장이 데스크를 맡아 세계적인 영화잡지 브랜드인 <프리미어>의 콘텐츠를 독점적으로 가져오며 좋은 반응을 얻었다. 당시로선 해외 감독과 배우들, 할리우드 업계 동향에 대한 최신 고급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중요한 창구였다. 이후 <씨네21> 출신의 최보은 편집장이 데스크를 맡으며 한국영화를 보다 비중 있게 다루면서 여 러모로 체질 개선을 시도하기도 했다. 2006년 격주간으로 전환했는데, 현재 1년에 두 번 정도 특별판을 내는 것으로 명맥을 잇고 있다.

2_6FILM 2.0 / 필름2.0
<미디어 2.0>이라는 온라인 저널로 시작해 2000년 오프라인으로 확장하며 <씨 네21>의 아성에 도전했다. YTN의 오동진, <씨네21>의 김영진, <프리미어>의 이 현수, <네가>의 이지훈 등이 참여해 구성과 디자인 면에서 보다 참신한 색깔을 더 했다. 기자 개인의 톡톡 튀는 언어를 개성으로 잘 담아냈고, 다양한 문화를 아우르 는‘ 생활의 발견’ 등의 꼭지도 큰 인기를 끌었으며‘, 영화잡지 중 사진과 디자인은 최고’라는 평을 듣기도 했다. 미디어2.0은 이후 <DVD2.0>과 <스포츠2.0> 등을 차 례로 창간하며 야심적인 행보를 보였으나 지속적인 경영난을 겪었고 결국 2008 년 문을 닫았다.

2_7Movieweek / 무비위크
2001년 11월, <스크린>을 만들던‘ 창인사’에서 주간지인 <무비위크>를 내놓았다. 1,000원이라는 파격적인 가격으로 신선한 반응을 얻었으며 이후 <필름2.0> 또한 가격 인하를 단행하는 등 영화잡지 저가 정책의 효시가 됐다. 서너 페이지 이상 긴 분량의 기획기사보다는 최신 개봉영화와 관련 인터뷰, 그리고 뮤지컬과 전시 관 련 기사 등 보다 대중적인 접근으로 폭넓은 지지층을 확보했다. 이후 <중앙일보> 에 인수됐으며, 최근 마지막 호를 낸 뒤 <M>이라는 새로운 영화잡지 형태로 흡수, 재발행에 나섰다.

두 개 의 사 건

과거 <씨네21>과 <키노>에서 있었던 두 개의 사건은 당시 영화잡지의 영향력과 파급력, 그리고 당대 영화문화의 지형도를 일러준다. ‘평론가와 감독의 대결’이라는 측면에서 가장 유명한 사건은, 1954년 <까이에 뒤 시네마>에 프랑수아 트뤼포가 ‘프랑스영화의 어떤 경향’이라는 글을 기고한 다음이다. 20대 초반의 혈기왕성한 평론가 트뤼포는 줄리앙 뒤비비에, 르네 클레망 등 당시 프랑스에서 존경받는 감독들의 영화를 평가절하하고 로베르 브레송, 장 콕도, 자크 타티 등 대중적 관심을 얻지 못한 감독들을 추앙했다. 이 평문은 이후 ‘작가주의’라 불리며 <까이에뒤 시네마>의 공식입장이 됐다. <씨네21>에서도 그와 비슷한 일이 있었다. 1996년 초 영화평론가 이정하는 <씨네21>에 기고한 <런어웨이>(1995) 비평문에서 “왜 영화감독은 자살하지 않는 것일까. 저렇게 가객들은 죽어가고 있는데.”라고 썼고 <런어웨이> 를 만든 김성수 감독과 절친한 사이인 이현승 감독이 “이제 막 데뷔한 신인감독을 만신창이로 만들었다”며 즉각적인 반박문을 기고했다. 이후 이정하의 절필 선언으로 논박은 일단락됐지만 그는 아직도 일체의 영화 글을 쓰고 있지 않다. 1997년 8월 변영주 감독의 <낮은 목소리2>가 개봉했을 때, <키노>는 변영주 감독에 대한 심층적인 인터뷰와 기획 기사 를 실었다. 하지만 그 기사의 바로 앞 페이지에는 여성들의 음란한 ARS 전화광고가 실려 있었다. 독자들의 항의전화와 투고는 빗발치듯 이어졌고, 바로 다음 호에 <키노> 편집부의 사과글이 게시됐다. 장문의 사과글은 그 페이지에 ‘근조’ 띠를 두른 다음 사진을 찍어 올려졌다. “광고부와 편집부의 방침이 다르다는 것으로 변명하고 싶지 않다.”는 요지의 글은 ‘다시는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게 하겠다’는 내용이었다. 애정 넘치는 독자들의 항의에 단순한 ‘바로잡습니다’가 아니라, 그 사과글 또한 특별하게 ‘연출’ 하여 독자와 소통했던 이례적인 일이었다. 말하자면 그런 에피소드들이 전혀 어색하게 받아들여지지 않던 문화의 시대였다.

비 디 오 데 크 와 P C 통 신

1990년대 영화잡지의 춘추전국시대는‘ 비디오’와‘ PC통신’이 함께 했다. 1980년대 이후 비디오 플레이어는 거의 모든 집에 보급됐고 말 그대로 ‘안방극장’의 시대였다. ‘다운로드’가 없던 시절, 최신 출시 신작 비디오를 차지하기 위한 경쟁은 그야 말로 치열했다. 영화광들에게는 프랑스문화원이나 동시상영관(영화광의 서로 다른 두 층위)에 가지 않고도 만족스러운 영화문화를 누릴 수 있게 된 것이다. 은밀한 불법 ‘B자’ 비디오도 더 이상 심야의 만화대본소가 아닌 개인의 공간으로 들어왔다. 그렇게 비디오대여 시대가 열리며 여성들에게도 영화광이라는 칭호를 허락하기에 이르렀다. 영화문화의 성적평등이라고나 할까. 호기심에 <원초적 본능Basic Instinct>(1992)과 <연인L’Amant>(1992), 그리고 <무엇에 쓰는 물건인고?>(1993) 를 숨죽이며 모여 보던 그들이 남성 영화팬들의 척 노리스나 실베스터 스탤론이 아닌 조니 뎁과 니콜라스 케이지, 그리고 리버 피닉스를 발견하게 된 것이다. 영화잡지의 실구매층이 주로 여성 독자들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비디오 시대’와 ‘영화 잡지 시대’는 결코 떨어져 있지 않다. 그리고 그 세대는 고스란히 천리안과 하이텔, 나우누리라는 PC통신 동호회로 넘어갔다. ‘영퀴방’ 등을 통해 모인 이들은 정보와 지식을 교환하고, 더 나아가 단편영화를 만들기 위한 스태프까지 구성하는 등 그것이 만드는 것이건, 평하는 것이건 ‘공동작업’의 형태를 띨 수밖에 없는 영화문화를 확장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렇게 비디오와 PC통신과 영화잡지는 ‘인터넷’ 혹은 ‘포털’이라는 거대 괴물 앞에 그 자취를 감췄다.
bf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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