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작의 세계관을 존중하면서도 영화만의 개성을 갖춘 작품 들로 재탄생하기를 기대한다.

<럭키>(2016)
지난 7월 열린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마스터 클래스에서 일본 감독 나카시마 데쓰야는 오리지널 시나리오를 쓰지 않는 이유에 대해 이렇게 밝혔다. 그의 영화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嫌われ松子の一生>(2006), <고백告白>(2010), <갈증渇き>(2014) 등은 모두 원작이 있다. “오리지널 시나리오로는 투자를 받기 어렵기 때문이다. 일본의 거의 모든 영화는 원작이 따로 있다.” 한국영화의 경우엔 아직 이 정도는 아니다. 단적인 예로, <명량>(2014)으로 시작해 <해운대>(2009)까지 이어지는 역대 흥행 순위 10위권 내에 원작이 따로 있는 영화는 한 편도 없다. <어벤져스The Avengers> 시리즈, <다크 나이트The Dark Knight>(2008) 같은 마블 코믹스 원작 영화들이 일부 이름을 올린 북미 박스오피스와 비교하더라도 차이는 뚜렷하다. 영화 제작을 위해 소설, 코믹스, 게임 등 전 분야를 통튼 콘텐츠 시장이 통째로 도굴되다시피 하는 세계적 추세에 비춰볼 때 확실히 독특한 양상이다.

그렇다고 충무로가 오리지널 시나리오만 고집하는 것은 아니다. 제작 편수가 해마다 늘고 있는 데 반해 전문 시나리오 작가 층은 점점 얇아지는 추세. 따라서 좋은 원작 콘텐츠를 찾기 위한 노력이 공격적으로 이뤄지고 있다. 2016년 개봉작 중에도 원작이 있는 영화가 여러 편이다. 대부분 소설을 원작으로 한다. 박찬욱 감독의 <아가씨>는 사라 워터스의 소설 <핑거스미스Fingersmith>가 원작이다. 여름 흥행작 <덕혜옹주>와 <터널> 역시 각각 동명 소설이 있고, 강우석 감독의 <고산자, 대동여지도>는 박범신 작가의 <고산자>를 바탕으로 만든 영화다. 김대승 감독의 <조선마술사>는 이원태, 김탁환이 공저한 동명 소설이 원작이다. 앞서 언급한 영화들과 차이가 있다면 기획 단계부터 영화와 웹소설, 책 출간 등을 염두에 두고 만들어진 콘텐츠라는 점이다. 영화 개봉 몇 개월 전 모바일 콘텐츠 플랫폼 카카오페이지에서 웹소설이 먼저 공개됐고, 첫 한 달 간 7만 뷰를 달성하며 인기를 끌었다.
700만 명에 가까운 관객을 모으며 올해 최고의 깜짝 흥행작이 된 <럭키>는 일본 영화 <열쇠도둑의 방법>이 원작이다. 일본 내에서 크게 흥행하진 않았지만, 우치다 켄지 감독이 제36회 일본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최우수각본상을 받는 등 스토리 자체의 참신함 자체는 인정받은 바 있다. <럭키>의 제작사 용필름은 판권을 구매한 뒤 이계벽 감독과 손잡고 주인공의 성장에 초점을 맞춘 이야기로 각색했다. 판권 구매는 원작의 인기가 아닌 ‘좋은 이야기 찾기’라는 기준이 우선해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알려준 사례다.
원작 선택은 유행을 타고

<내부자들>(2015)
여기서 잠시 충무로에서 시기별로 선호된 원작 유형을 살펴보자. 2000년대 초반 붐이 일었던 인터넷 소설은 영화계에도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 시작에 <엽기적인 그녀>(2001)가 있다. 이 영화가 터뜨린 흥행 대박은 인터넷 소설 원작 영화 제작 붐을 일으켰다. <동갑내기 과외하기>
<내 사랑 싸가지><늑대의 유혹><그놈은 멋있었다> 등이 모두 2003~2004년 사이에 개봉한 영화들이다.

<은밀하게 위대하게>(2013)
이후 인터넷 문화의 유행은 웹툰으로 넘어간다. 폭발적으로 성장한 웹툰 시장은 충무로에 새로운 원천이 됐다. <아파트>(2006), <순정만화>(2008), <이끼>(2010), <은밀하게 위대하게> 등 숱한 웹툰이 영화로 제작됐다. 윤태호 작가의 미완성 웹툰을 원작으로 한 <내부자들>이 제작되는 등 여전히 판권 인기가 식지 않는 분야다.

<도가니>(2011)
소설의 영화화도 꾸준히 이어졌다. 2010년 이후만 해도 <도가
니>, <완득이>, <고령화 가족>(2013), <우아한 거짓말>(2014),
<화장>(2015) 등 여러 작품이 영화로 재탄생했다. 베스트셀러 작가의 경우 소설이 출간되기도 전에 영화화 판권 제안을 받기도 한다. <내 심장을 쏴라><7년의 밤> 등을 쓴 김유정 작가가 대표적이다. 그의 최근작 <종의 기원>은 출간 전부터 영화화 계약 제안이 쏟아진 것으로 알려졌다. 데뷔작 <내 인생의 스프링캠프>를 비롯해 김 작가의 모든 작품은 영화 판권이 이미 팔린 상태다. 바꿔 말하면 이는 인기 높은 원작 콘텐츠의 판권 구매 경쟁이 그만큼 심화됐다는 뜻이기도 하다.

<완득이>(2011)
사정이 이렇다 보니 최근 몇 년 사이 새로운 움직임도 일었다. CJ E&M 콘텐츠 개발실의 경우 아예 원천 콘텐츠를 개발하고 나섰다. 소설과 웹툰, 그래픽노블 등의 콘텐츠를 직접 개발하거나 원작 판권을 구매해 영상화를 제안하는 것이다. 신인과 기성 작가 모두를 아우르며 좋은 작품을 프로듀싱하겠다는 개념으로, 원천 소스(IP)를 축적할 뿐 아니라 시나리오 개발 단계에서 발생하는 오류를 줄이겠다는 계산이다. CJ는 웹툰 플랫폼 레진코믹스와 지난 2014년 확장 가능한 원천 콘텐츠를 웹툰으로 공동 제작하기 위한 제휴를 체결하기도 했다.
원작의 인기가 능사는 아니다
검증된 원작을 스크린으로 옮길 때 생기는 강점은 여러 가지다. 가장 기본적인 건 사전 마케팅 효과다. 영화로 만들어지기 전 대중에 선보여 호응을 얻었던 작품인 만큼 인지도는 어렵지 않게 확보 가능하다. 제작자들은 투자 용이성을 꼽기도 한다. 특히 웹툰이나 그래픽노블의 경우 시나리오보다 영화화에 대한 설득력 있는 그림을 제시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바로 이 점 때문에 연출가들이 직접 장편영화 제작을 위해 원천 콘텐츠를 개발하기도 한다. 지난해 개봉해 흥행에 성공한 <검은 사제들>은 장재현 감독이 2014년에 만든 자신의 단편 <12번째 보조사제>를 원작 삼아 만든 영화다. 개봉 당시 장 감독은 “영화에서 주요하게 다뤄지는 부마 의식 등이 생소한 소재이기 때문에 단편을 포트폴리오의 개념으로 만들면 장편 제작이 좀 더 수월할 것으로 예상했다”고 밝힌 바 있다. 지난 11월 부산국제영화제에서 공개된 명필름영화학교의 두 번째 작품 <환절기>의 원작은 이동은 감독이 2012년에 직접 펴낸 동명 그래픽노블이다.

흥행에 어느 정도 성공할 경우 영화와 더불어 원작 시장 역시 윈윈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앞으로도 원작 영화 열풍은 쉬이 사그라들지 않을 전망이다. 특히 출판의 경우 영화 판권 판매가 절대적인 수익원이 되기도 한다. 원작에 대한 광고 효과는 덤이다. 출판사가 영화화 판권을 계약할 때 책 제목을 그대로 사용할 것을 요구하는 중요한 이유다. 영상 제작을 위한 소설을 전문적으로 출간하는 출판사도 생겼다. 출판사 고즈넉은 <직필><별안간 아씨>를 비롯해 소설 6권의 영화화 판권을 판매하면서 짧은 연혁에 비해 주목할 만한 성과를 거뒀다.
당연한 말이지만, 인기 소설이나 웹툰 등을 단순히 영화의 밑그림 정도로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흥행에 성공하거나 좋은 평가를 얻었던 영화들은 치열한 각색의 과정이 뒤따랐다. 이는 오리지널 시나리오 개발에 들어가는 공력과 별반 다르지 않다. 변영주 감독의 <화차>(2013)를 보라. 미야베 미유키의 원작에서 비중이 거의 없었던 약혼자의 존재감을 키워 세 사람 사이의 팽팽한 긴장감이 극을 이끌어가도록 만든 각색이 아니었다면, 이 영화는 원작의 명성에 가린 실패작이 됐을지 모른다. 흥행에 참패한 웹툰 원작 영화 대부분이 원작의 이야기를 굳이 영화로 다시 봐야 하는 이유를 만들어내지 못 했거나, 웹툰이라는 플랫폼의 특성 자체를 이해하지 못한 단편적 영화 각색을 선보였기 때문이라는 점 역시 주목할 필요가 있다. 결국 원작이 인기를 끌었다는 사실보다 중요하게 파악해야 하는 건, 그 인기의 맥락을 분석해 영화 매체만의 강점으로 이식할 수 있는지다. 원작이 담고 있는 메시지가 현 시대와 호흡할 수 있는 이야기인지도 중요하다.
최근 개봉한 <당신, 거기 있어줄래요>는 기욤 뮈소의 동명 인기 원작을 한국적 상황에 기반해 각색했다. 여주인공의 직업, 시대 상황 등을 공들여 만진 시나리오를 원작자 역시 무척 마음에 들어 했다는 후문이다. 뒤이어 <7년의 밤><살인자의 기억법> 등 소설 원작 영화와 주호민 작가의 동명 웹툰을 원작으로 한 초대형 프로젝트 <신과 함께> 등도 줄줄이 개봉을 앞두고 있다. 임순례 감독과 신예 김태리의 만남으로 화제를 모은 일본 동명 만화 원작 <리틀 포레스트> 역시 곧 촬영에 들어간다. 원작의 세계관을 존중하면서도 영화만의 개성을 갖춘 작품들로 재탄생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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