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최고의 영상후반작업 기술자이자 부산영상산업의 한 축을 책임진 CEO와의 면담은 그렇게 어렵사리 성사됐다.
부산영상후반작업시설 (주)에이지웍스의 이용기(41) 대표는 여간해서 만나기 힘들다. 부산 해운대구 우동에 있는 사무실은 늘 비어있다. 이달 초에도 내내 중국 출장이었다. 지난 10일 겨우 약속을 잡고 회사를 찾았을 때에도 부산시청 관계자들과 면담 중이었다. 이 대표가 사람 좋은 웃음으로 “아, 미안해요”하며 나타난 것은 그로부터도 몇십 분 뒤였다. 국내 최고의 영상후반작업 기술자이자 부산영상산업의 한 축을 책임진 CEO와의 면담은 그렇게 어렵사리 성사됐다.
무척 바빠 보인다. 중국 출장 건은 잘 진행됐나.
중국 대만과 같은 중화권에서는 이제 에이지웍스가 제법 유명하다. 중국의 가장 큰 민영 영화제작회사인 화이브라더스 작품을 몇 개 했는데 덕분에 이름이 알려 졌다. 영화판은 인맥, 안면 이런 게 중요하다. 유명 감독들이 우리와 작업을 해 보고 그 결과에 만족해 입소문을 내주고 있는 게 다행이다.
유명 감독이라면 우리도 아는 사람인가.
서극 감독, 오우삼 감독 이런 사람들 말이다. 화이브라더스의 대표 감독인 펑샤오강 감독도 이제 우리 회사를 다른 사람에게 소개시켜 줄 정도가 됐다. 중국말로 ‘꽌시(關係)’가 생긴 거다.
그동안 재정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말이 많이 나돌았다. 중화권 인지도 향상이 경영에 도움이 되나.
에이지웍스는 지난해 2월 창업했다. 문을 연지 이제 1년이다. 신생 회사이니만큼 포트폴리오라는 것도 없었다. 국내는 물론 국외에도 이름이 알려지는 데는 시간이 필요하다. 회사에는 영업 사이클이라는게 있다. 조급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제일 처음 업계에 몸을 담게 된 계기가 궁금하다. 처음부터 영화 쪽 일을 했나.
대학교 4학년 졸업을 하기도 전에 ‘세종문화’라는 CF프로덕션 회사에 입사했다. 이 회사에 있던 윤석태 감독이라는 분과 제 지도교수님이 친한 사이였다. 윤 감독 밑에서 CF조감독으로 맨 처음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만약 그 길로 계속 갔더라면 지금쯤 CF감독이 돼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요즘 소위 날리는 CF감독 중에서 동기들이 많다. 한 40%는 다 내가 아는 사람들이다. 만약 그 회사에서 계속 일을 했으면 ‘다시다’ ‘사이다’ 이런 광고를 찍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왜 그 길로 계속 가지 않았나.
처음에 수습사원으로 연출부에서 일을 했다. 근데 쓰레기통 같은 세트장에서 매일 밤새고. 이건 내가 할 일이 아니다는 생각 밖에 안 들었다. 연예인들 보는거 재미있어하고 그런 거 좋아하는 사람들이나 하지. 내 눈에는 그런 게 하나도 안 들어왔다. 그러다 다른 방을 얼핏 보니까 1인치 필름으로 편집이라는 걸 하고 있었다. 그게 참 멋있어 보였다. 기계에 버튼도 수십 개 붙어있고. 그때부터 관심은 딴 데 있었던 거다.
회사를 옮긴 결정적인 계기가 있었나.
광고도 영상을 찍은 다음에 후반작업이라는 걸 한다. 세종문화는 후반작업을 삼부프로덕션이라는 회사에 맡겼다. 삼부는 당시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후반작업 회사였다. CF의 40% 가량을 여기서 편집할 정도였으니까. 수습기간 3개월이 지나고 정식사원으로 발령받기 직전 어느 날이었다. “내가 보니까 너는 빨리 ‘입봉(첫 작품 제작)’할 수 있을 것 같다”고 사수인 윤 감독이 격려해줬다. 윤 감독이 원래 굉장히 무서운 분이다. 마음에 안 들면 먹던 자장면 그릇을 얼굴에 갖다 바를 정도다. 어디서 용기가 났는지 거기다 대고 나는 “CF 편집실로 보내줄 수 없을까요”라고 말해버렸다. 감독은 “정식 발령을 내놨는데 딴 데 보내달라고 하는 놈은 니가 처음이다”고 어이없어 하셨다. 말씀은 그렇게 하셔도 나를 예쁘게 보셨던지 거래처인 삼부에 소개시켜줬다. 고된 일이 그때부터 시작됐다.
삼부에 입사해서 그 고대하던 필름을 만졌나.
말단 심부름부터 시작했다. 편집실에는 CF 촬영본 테이프 말고 배경화면 등에 사용하는 소재테이프라는 게 있다. 소재실에 가서 그 테이프를 찾아오는게 내 일이었다. PD들이 편집을 끝내면 쓰고 남은 1인치 테이프가 엄청 쌓인다. 이걸다시 정리해서 소재실에 갖다 놔야 한다. 완전 ‘시다바리’였다. 그 생활을 7개월간 했다. 그러다 또 옆방으로 눈을 돌렸는데 텔레시네라는 부서가 있었다. 여기는 필름을 만지는 거 아닌가. 편집실은 규모도 크고 선배들도 많았지만 텔레시네는 방 달랑 하나에 선배도 딱 2명이었다. 여기서 마침 사람을 뽑아달라는 중이었다. 운이 좋았다.
텔레시네가 무슨 일인가.
텔레시네는 필름으로 돼 있는 영상신호를 색보정을 거쳐 비디오 신호로 전환하는 작업이다. 지금의 디지털색보정(DI) 개념과 기본적으로는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전공이 컴퓨터인가.
컴퓨터와는 전혀 상관없다. 사진 전공이다. 이 계통에 있는 사람들 대부분이 컴퓨터와 거의 상관없는 사람들이다. 나는 포토샵도 할 줄 몰랐다.
낯선 일이었을 텐데 실수는 없었나.
발령 첫날부터 사고쳤다. 당시 김청기 감독의 영화를 하고 있었다. 35㎜ 필름은 세워서 들어야 하는데 그걸 가로로 드는 바람에 감겨있던 필름이 모두 빠져 헝클어져 버렸다. 선배가 “첫날부터 사고냐. 도저히 안 되겠다”면서 “필름값 1000만원 물어내라”고 난리였다. 그때 한달 월급이 60만~70만원 정도였는데 돈이 어디 있나. 2시간 동안 울었다. 알고 보니 앞으로 조심하라고 선배가 겁준 거더라. 어려운 일을 거치면서 일을 배워나갔다. 이후 텔레시네 회사만 몇 군데를 옮겼다.
영화와의 본격적인 인연은 언제부터인가.
할리우드현상소 시절이다. 당시 할리우드현상소는 텔레시네 부문에서 우리나라에서 가장 대표적인 회사 가운데 한 곳이었다. 이 회사 대표가 텔레시네를 국내에 가장 먼저 도입한 사람이다. 이 회사 대표가 어느 날 나를 만나자고 했다. 소주 한잔 사면서 꼬셨다. “색보정이라는 걸 아냐. 색보정 기계를 들였으니까 와서 일을 해라. 사진을 전공했으니까 영화필름도 잘 만질거다”라고 설득했다. 알고 보니 그 필름과 이 필름은 다른 거였다. 또 속은 거다
색보정을 할 줄 알았나.
할리우드현상소 사무실에 갔더니 색보정 기계를 사놓고 박스도 풀지 않은 채였다. 설명서를 읽으면서 방법을 배웠다. 초반에는 필름 끊어 먹는 게 일이었다. 영화사에서는 재료비 많이 든다고 엄청 싫어했다. ‘맨땅에 헤딩’이라는 게 이런 거 였다.
현상소에서도 에피소드가 많았을 것 같다.
영화 <괴물>에 관련된 게 생각난다. 영화 개봉 바로 전날이었다. 전야제를 하는데 영사실 몇 곳에서 연락이 오기 시작했다. ‘바이러스’ 어쩌고 하는 장면 기억 나나. 어떤 사람은 자막을 봤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못 봤다고 하는 거다. 일부 편집본에서 실수로 자막이 빠진 채 배급된 걸 나중에 알았다. 어떤 사람은 송강호도 알아듣는 영어를 관객은 모르느냐는 식의, 감독의 의도된 작업으로 해석하기도 했다고 들었다. 밤 11시에 충무로 필름 배달회사 사람을 불러 일일이 확인 교체했다. 다음날 새벽 1시 쯤 끝났다. 그래도 사고가 한 군데는 나더라. 대구였다. 봉준호 감독에게 죄송하다 했더니, 자기가 끝까지 확인을 안한 책임이라고 해서 더 미안했다. 현상소에서 실수하면 영화가 대박난다는 말이 있다. 진짜 대박나지 않았나. 그렇게 8년을 일했다.
‘브리지 바이 패스’라는 기법을 처음 사용한 것으로 들었다.
특수현상 기법 중 하나이다. 원래 필름을 현상할 때에는 필름에 붙어있는 은 성분을 모두 떨어내야 한다. 근데 나는 원본필름에 은을 남겼다. 그러면 모노톤의 색이 나온다. 영화 <친구>를 보면 색을 뺀 것 같은 느낌이 나지 않나. 그거다. 촬영 원본 필름에 손을 댄 것은 아마 내가 처음일거다. 나중에 필름회사에서 알고 난리치기도 했다. <친구> <살인의 추억> <처녀들의 저녁식사> <유령>이 모두 그 런 영화이다. <친구> 이후부터는 트렌드가 되다시피 했다.
작품을 얼마나 했나.
300편 정도. 한창 때는 일년에 40~45편 정도 했다. 한국영화 70~80%에 해당하는 물량이다. 지금 아날로그 색보정하는, 살아있는 사람 중에 내가 제일 많을거다. 어두운 방안에서 뭉근히 앉아서 일하는게 딱 적성이다.
우리나라에 디지털색보정(D.I)을 대중화시킨 장본인이라고 들었다.
2004년인가 2005년인가 HFR로 스카우트됐다. 디지털색보정은 아날로그로 하던 것을 컴퓨터로, 실제 스크린과 비슷한 환경에서 화면을 보면서 색깔을 맞추는 작업이다. DLP로 색보정을 한 것도 처음이다. 영화진흥위원회가 전국의 극장 회사 등에 있는 DLP 환경을 모두 조사한 적이 있다. 작업을 표준화하기 위해서다. 전국 1등이었다. 눈대중으로 맞춘 건데도 기계보다 정확했던 거다. 색을 하도 많이 보니까 음악의 절대음감 같은게 생겼다. 초반에는 우리나라 영화 중 1년에 1~2편 정도 D.I를 했다. 근데 비주얼 좋은 영화를 세 개 정도 잇따라 하고 나니 보는 시선이 달라졌다. 그게 <달콤한 인생> <친절한 금자씨> <웰컴투 동막골> <형사>같은 영화다. 두세 달 사이에 4~5작품 하니까 입소문이 나서 조금씩 작업 물량이 늘게 됐다. 이제는 단편영화도 DI를 한다.
색보정 기술자의 역할은 무엇인가.
영화에 자신의 느낌을 안 넣는게 좋다. 모든 영화는 현장에서 색깔을 결정해온다. 그걸 감안해야 한다. 이 자리에 앉으면 이 색깔이 좋을까 저 색깔이 좋을까 색을 한번 빼보고 싶은 충동이 있다. 하지만 따로따로 놀면 안 된다. 그러면 100% 가는 거다.
에이지웍스와의 인연은 어떻게 시작됐나.
김성수 감독이 찾아왔다. “잘 들어. 박광수 감독님 알지. 감독님이 부산에서 무슨 일을 하나 하는데 도와줄 수 있지. 무조건 내일 찾아뵙고 한다 그래. 캐묻지 말고 가서 도와드려라” 하는 거다. 그 다음날 박광수 감독님 찾아뵙고 일이 시작됐다. 에이지웍스는 기획단계에서부터 함께 했다. 할리우드현상소 그만두기 1 년 전부터 에이지웍스 이야기가 나왔다. 근데 생각보다 기간이 많이 길어졌다. 더 빨리 시작했으면 더 좋았을 거다. 전체 스케줄이 지연되면서 생각보다 돈이 많이 들어갔다.
쉬커(서극) 감독과 <적인걸> 작업을 하고 있다고 들었다. 어떤가.
그런 세계적인 감독과 작업하는 것은 처음이다. 나는 감독의 영화를 보면서 자란 세대다. 그런 사람과 눈앞에서 작업을 하게 되니 처음엔 부담이 많았다. 하지만 작업 자체는 똑같았다. 입으로 떠드는 거 보다 보여주고 그림으로 말하는 게 많다. 감독이 이것저것 해보고 싶은 욕구가 많았다. 감독이 전에 흑인 백인과 일을 다 해봤는데 이거 해달라고 해보면 안 된다고 하는게 많았던 모양이다. 근데 나는 다 해줬다. “D.I는 어떤 걸 주문해도 다 되더라. 앞으로는 AZ하고 작업 할꺼다.” 감독이 그렇게 말을 하고 다니신다고 들었다. 화이브라더스의 대표감독 펑샤오강이나 쉬커 감독은 에이지웍스를 친구회사로 생각하고 있다. 북경 제편창이 투자하는 영화의 감독도 만나자고 했다. 인민영화이다. 중국에서는 관영 민영 모두 네트워킹이 생긴 셈이다.
궁극적인 목표가 무엇인가.
지역의 인력을 양성할 예정이다. 현재 서울에서 내려온 직원이 많아 이직율이 높은 편이다. 결국 지역에서 인력이 수급돼야 조직이 안정적으로 굴러간다. 영화진흥위원회, 부산시와 함께 기술아카데미를 만들어 고급인력, 상시가용인력을 하 루 빨리 양성할 생각이다. 회사 내부적으로는 안정화가 급선무다. 중화권 메인스 트림에 빨리 진입해야 한다. 하반기부터는 중국을 보다 집중적으로 노크할 생각이다. 궁극적으로는 에이지웍스가 기획 제작한 애니매이션을 선보이는게 꿈이다. 빠르면 2013년, 늦어도 2014년까지는 그렇게 해보고 싶다. 얼마나 멋있겠나.
이용기 대표는 인터뷰가 끝나기 무섭게 총총 사라졌다. 부산시 관계자들과의 면담이 아직 끝나지 않은데다 방송국과의 일정으로 서울 출장도 잡혀있었다. 최소한 이 대표에게만은 바쁜 것은 좋은 일임에 틀림없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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