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아이즈 와이드 셧 EYES WIDE SHUT>을 들으며
스크린에는 <왈츠 2번> 연주와 함께 두 배우의 이름이 하얀 글씨로 떠오른다. 탐 크루즈, 니콜 키드먼, 당시 실제 부부이기도 했던 이 배우들의 춤을 감독할 지휘자인 스탠리 큐브릭의 이름까지. 이후 카메라는 옷을 훌러덩 벗어버리는 니콜 키드먼을 비춰낸다. 눈 깜짝할 사이에 그녀의 벗은 몸은 암흑 속으로 사라져버린다. 그제야 보란 듯이 제목이 떠오른다. EYES WIDE SHUT.
눈을 질끈 감고 추는 왈츠
어둠 속에 앉아 가만히 귀를 기울이면, 익숙한 음악을 들을 수 있다. 쿵작짝, 쿵작짝, 쿵작짝, 쿵작짝. 3/4박자의 춤곡인 왈츠 연주에 우아한 기품을 가진 발걸음이 연상된다. 널리 알려져 있는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의 <재즈 왈츠 2번>은 가늠할 수 없는 비애와 우수를 불러일으키는 멜로디로 중독성이 강한 곡이다. 마치 두 남녀에게 어떤 사연이 있음을 예감이라도 하듯. 하긴, 사연 없는 남녀가 어디 있겠는가. 그들이 부부라면 더할 나위 없다. 그럼 연회가 시작되니 남자와 여자를 소개해야겠다. 스크린에는 <왈츠 2번> 연주와 함께 두 배우의 이름이 하얀 글씨로 떠오른다. 탐 크루즈, 니콜 키드먼, 당시 실제 부부이기도 했던 이 배우들의 춤을 감독할 지휘자인 스탠리 큐브릭의 이름까지. 이후 카메라는 옷을 훌러덩 벗어버리는 니콜 키드먼을 비춰낸다. 눈 깜짝할 사이에 그녀의 벗은 몸은 암흑 속으로 사라져버린다. 그제야 보란 듯이 제목이 떠오른다. EYES WIDE SHUT.
뉴욕의 상류층 윌리엄 하포드(탐 크루즈)와 아내 엘리스(니콜 키드먼)는 억만장자인 지글러(시드니 폴락)에게 초대되어 파티에 참석하게 된다. 이곳에서 윌리엄 하포드는 오래 전 의대 동기였으나 피아니스트가 된 닉 나이팅게일을 만난다. 반가운 인사를 나누던 중 윌리엄에게 지글러의 비밀스러운 부름이 찾아온다. 욕실에서 지글러와 함께 밀회를 나누던 여자가 마약으로 인해 실신을 하게 된 것이다. 조속한 조취로 위험한 상황을 벗어난 이들은 윌리엄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한다. 한편 엘리스는 헝가리의 신사와 춤을 추며 은밀한 대화를 이어가지만 결국에는 남편을 찾아야겠다며 그를 떠난다. 집으로 돌아와 벌거벗은 채로 서로의 몸을 탐닉하는 이들 부부의 시선이 부자연스럽다. 특히나 엘리스는 불안하면서도 섬뜩한 눈빛으로 남편의 애무를 받아들인다. 다음날 저녁, 침대 위에서 마리화나를 나눠피우던 이들 부부는 서로의 욕정과 정절 사이에서의 윤리에 대한 부부의식을 확인하려들지만 점차 갈등으로 치닫게 된다. 엘리스는 아이와 남편을 떠나 버리고 호텔에서 스친 이름 모를 해군 장교와 관계를 맺고 싶었다는 말을 꺼낸다. 이후 윌리엄은 자신의 환자의 부고를 듣게 되어 집을 나서게 되지만 머릿속에는 이미 아내와 장교의 정사가 한편의 영화처럼 잠식해 벗어날 수 없다. 그런 그에게 논리로는 설명되지 않는 사건들이 벌어진다. 상류층의 은밀한 성적 판타지는 윌리엄이 맞닥뜨린 현실과 그가 창조해낸 환상의 줄기 속에서 교묘하게 섞여 들어간다.
코는 어디로 갔는가
쇼스타코비치가 처음으로 각색한 오페라는 니콜라이 고골의 <코>라는 단편소설이다. 8급 관리 코발로프는 어느 아침에 일어나보니 자신의 코가 반듯하게 잘려나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런데 이 코는 5급 관리의 복장을 한 채로 시내를 돌아다니고 있는 게 아닌가. 자신의 코를 되찾기까지의 우스꽝스러운 풍자를 선사하고 있는 소설의 주인공만큼이나 윌리엄의 행보는 가늠할 수 없다. 윌리엄의 걸음걸이와는 약간 어긋나 있는 피아노 건반의 두드림은 얼음장에 선 것처럼 차갑지만 관객은 기이하게 빨려들고야 만다. 졸탄 코다이를 사사한 리게티 죄르지는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에서 만큼이나 인상적인 사운드를 선사한다.
정처 없이 뉴욕시내(촬영은 런던에서 진행되었다)를 돌아다니는 그 밤, 윌리엄이 가면을 쓰고 (성적)의식을 치르는 사람들의 모임에 침투하게 된 것도, 그 가면을 잃어버린 것도 우연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코발로프의 코가 어느 날 갑자기 돌아왔듯 윌리엄의 가면 역시 아내가 자고 있는 침대의 배게 위에 고스란히 놓여 있다. 그는 아내를 깨워선 참회의 눈물을 흘린다. 질투와 욕정 속에서 그가 당도하게 된 목적지는 가족의 품이다. 크리스마스, 아이의 선물을 사러간 이들 부부에게는 3일 전과는 또 다른 묘한 분위기가 감지된다. 사랑을 영원히 간직하려는 남자와 단지 현실 위에 놓으려는 여자의 대사 위로 또다시 왈츠의 멜로디가 퍼져 오른다. 아직 무도회가 끝나지 않은 것이다.
스탠리 큐브릭에 열광한 적 있는 관객이라면 그의 유작이 된 <EYES WIDE SHUT>에 진한 아쉬움을 느낄 것이다. 우리는 더 이상 이미지에 관한 광기어린 집착을 가진 괴짜 감독의 새로운 도전을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가 마술처럼 부려놓은 영화들, 이를테면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 <시계태엽 오렌지> 등 영화사에 길이 남을 명작들은 지금 이 순간에도 잠 못 이루는 영화광을 양산하고 있으며, 수많은 작품의 모티브와 오마주로 변주되고 있다. 스탠리 큐브릭의 이미지는 단 한 번도 정지한 적 없으며, 고착된 적 없다. 흐르는 이미지를 자신만의 프레임 속으로 한계 지어야만 하는 영화감독들의 고뇌는 아름답다. 저 어두운 극장 속을 고요히 밝히는 스크린 불빛은, 밤하늘에 떠오른 별처럼 고독하나 위대하다. 자, 이제 질끈 감은 눈(EYES WIDE SHUT)을 뜨고 흘러나오는 왈츠에 몸을 맡겨보자. 그리고 영화를 사랑한 어느 감독이 전해주는 기묘한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보자. 무도회는 결코 끝나지 않을 것이다.
![오성은의 막귀 씨네마 [아직 무도회는 끝나지 않았다]](https://fb.snsmodoo.com/wp-content/uploads/2016/11/오성은의-막귀-씨네마1.jpg)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