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속 부산이 아닌 부산영화의 시대가 오다!

2015년에는 다양한 시도들을 통해 부산이 자생적으로 영화제작 환경을 조성할 수 있는 발전 방향을 제시했는데, 그 대표적인 촬영 현장 2곳을 다녀왔다.

더 이상 부산은 한국영화의 배경이 아니라, 부산만의 정서와 가치, 미학이 담긴 ‘부산영화’를 구축해 가고 있다. 지난해 11월 20일부터 24일까지 제17회 부산독립영화제가 열렸다. 말 그대로 부산에서 부산영화인들이 제작하는 독립영화들이 총망라되는 뜻깊은 행사다. 지지난해 까지 “메이드인부산독립영화제”라고 불렸던 것에서 호칭도 새롭게 바뀌었다. 심기일전해서 새롭게 발전하겠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그 새 출발의 현장에는 어떤 일들이, 어떤 영화들이 있었을까. 격식을 차린 총평은 재미없을 것 같다. 대신 심사위원으로 영화제를 찾은 정한석 평론가의 지극히 개인적인 참관기를 여기 부친다. 또한, 2015년에는 다양한 시도들을 통해 부산이 자생적으로 영화제작환경을조성할 수 있는 발전방향을 제시했는데, 그 대표적인 촬영 현장 2곳을 다녀왔다. (편집자 주)

2015 부산독립영화제, 그 5일간의 일정

11.20

오후 늦게 영화의전당 앞에 도착했다. 두어 시간을 다른 일로 보낸 뒤 7시 개막에 맞춰 극장으로 향했다. 개막식장에 들어서며 다소 놀랐는데 이유는 관객이 예상보다 훨씬 많아서였다. 중극장을 거의 매운 채로 개막이 선언됐다. 동석했던 영화제 관계자도 “올해는 유독 사람이 많은 것 같다. 우리 영화제가 원래 이런 데가 아닌데 왜 그런지 모르겠다.”며 반쯤 농담을 섞어 기쁜 마음을 표현했다. 정성욱 공동 집행위원장의 인사말 중에서 언뜻 이유를 발견한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지난해까지 ‘메이드인부산독립영화제’라는 명칭을 쓰다 올해부터 ‘부산독립영화제’라는 명칭을 쓰기로 했다.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고 그는 말했다. 처음에는 아주 조촐한 행사로 시작했던 것인데 부산에서 만들어지는 독립영화들이 제대로 상영될 기회가 없는 것이 안타까워 그랬다는 것이다. 그러다 점점 영화들이 많아지고 실력들이 출중해지면서 이제는 더 이상 ‘메이드인’이라는 수식을 붙이지 않아도 당연히 부산에서 만들어진 독립영화들이 모여 축제를 벌이는 중요한 현장으로 인정받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 중요도에 걸맞게 영화제의 이름도 바꾸고 심기일전하겠다는 뜻으로 들렸다. 관계자들뿐만 아니라 부산독립영화협회 회원도, 일반 관객도 그런 쇄신의 분위기를 함께 즐기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개막작의 제목은 <4.16 옴니버스 프로젝트>였다. 장희철, 오민욱, 김대황, 정성욱 감독이 세월호를 소재로 만든 추모의 프로젝트다. 부산을 대표하는 극영화 감독(장희철, 김대황), 다큐멘터리 감독
(오민욱), 촬영 감독(정성욱)이 참여한 것이다. 한편으로는 전부 부산독립영화협회의 주축들이기도 하다. 왜 내부자들끼리 모여 만들었느냐는 오해를 살만도 한데 이유를 들어보니 오히려 박수칠 만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옴니버스 프로젝트의 소재가 정해지고 막상 제작을 시작하려 할 때 제작비나 제작에 소요될 일정 문제 등으로 누군가에게 도저히 그 부담감을 떠맡길 수 없는 상황이

되자 각자 자신들이 책임을 맡아 진행하게 되었다고 한다. 남들이 하기 어려워하는 일을 자신들이 그냥 떠안은 셈이다. 이건 작품의 질을 논할 것이 아니라 그들이 보내는 애도의 마음을 받아들이기만 하면 되는 일이라고 그들의 말을 들으면서 생각했다. 받지 못할 것을 알면서 오늘도 딸에게 전화를 거는 아버지의 슬픔(장희철의<닿지 않는>), 사건과 재난을 주의 환기시키려는 자연 풍경의 저 떨림(오민욱의 <적막의 경관>), 사랑했던 소년과 소녀의 이별극이 전하는 안타까움(김대황의 <새의 침묵>), 우정 깊은 친구들이 영원한 작별인지 모르고 서로 떠나보내는 순간에 던지는 웃음(정성욱의
<현수의 노래>)이, 이 애도의 프로젝트의 내용이었다

11.21

그러니까 지난밤. 격의 없는 동료나 친구들이 혹은 금방이라도 그렇게 될 만한 이들이 어울리다 보니 늘 술렁거리는 것이 독립영화계의 술판이다. 게다가 개막식 뒷풀이 장이 아니었던가. 그 안에서 반쯤 취해 있다가 올해의 장편초청 부문에 초대 받은 <범전>의 오민욱, <그림자들의 섬>의 김정근 감독과 처음 만나 어울렸다. 만나보고 싶은 감독들이었다. 두 사람 다 겸손했고 선하게 느껴졌다. 오민욱 감독이 자신의 영화에 관한 내 의견을 물었을 때 호감을 전제로 하고 아쉬운 점을 몇 가지 말했는데 술에 젖은 말은 제대로 된 말로 나오지 않았다. 그가 오해했을지도 모르겠다, 만나면 다시 말해주어야겠다, 라고 문득 어젯밤의 일들을 떠올리면서 늦은 오후에 극장으로 향했다.
내가 해야 할 일은 총 여섯 개의 경쟁섹션 안에 있는 스물다섯 편의 단편영화를 보고 심사하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앞으로 부산영화계를 짊어질 새싹들의 현재를 평가하고 미래의 가능성을 진단하는 몫을 맡게 된 것이다. 이 날은 두 개의 섹션을 보았고 두 편의 영화가 특히 돋보였다. 김수지 감독의 <나는 집으로 간다>, 최정문 감독의
<신탄진>이었다. 두 개의 섹션을 보았을 뿐인데 꽤 수준 있는 영화들을 본 것 같다, 이런 수준 높은 작품들이 앞으로도 많은 것이냐고 물었을 때 한 관계자가 “그중에서 가장 좋은 섹션을 본 것 같다.”고 귀띔해주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집으로 간다>와 <신탄진>은 결국 수상작이 됐다. 두 편은 그럴 자격이 있다.

<나는 집으로 간다>는 다소 미숙하기는 해도 감독의 미래를 기대할 만한 매력을 지녔다. 고등학교 남학생이 하루쯤 가출을 감행한 것 같다. 길거리에 앉아 담배를 피우다 이곳에 다큐멘터리를 찍으러 온 20대 중반의 여인과 만나 대략 반나절을 보내는 이야기다. 동네 로드무비라고 불러도 될 법하다. 사건 사고는 거의 일어나지 않으며 영화는 일면 매우 평범해 보인다. 하지만 세심한 진동이 곳곳에서 느껴진다. 진지하면서도 유머러스하고 설레면서도 편안하다. 감독이 어떤 사람인가 궁금하여 마저 남아서 GV (Guest Visit)를 들었는데 다른 감독들에 비해 유독 말이 짧다. 예상 밖의 답도 들었다. “집이라는 공간이 주는 따뜻하고 포근한 느낌을 주고 싶었다.”고 감독은 말했다. 하지만 이 영화의 가장 좋은 장면들은 후반부에 이르러 주인공이 집에 들어간 이후가 아니라 그 직전까지다. 감독은 자신이 주요 관심사로 삼았던 것과 자신이 가장 매력적으로 표현해내고 있는 것을 아직 변별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어쩌면 그게 더 가능성일지도 모르겠다고 그의 말을 들으며 생각했다. 무엇보다 이 영화를 만든 감독의 장점은 낭비되지 않고 깨끗하게 활동하는 쇼트들로 영화의 질감을 형성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런 건 귀한 재주다.

그에 비해 <신탄진>은 집요한 프로의 면모를 지녔다. 자기가 무엇을 잘하는지 확실히 알고 어디서 관객을 감정적으로 포박해야 하는지도 아주 잘 알고 있는 영화처럼 보였다. 달리는 기차 안에서 대학생들이 무언가 연극이나 퍼포먼스에 관한 회의를 하고 있다. 극 중 여자가 울어야 할 것이냐 말 것이냐 하는 것이다. 열띤 회의를 거듭하던 그때 그들은 한 남자 선배를 만나게 된다. 한 눈에도 그가 과거에는 일원이었으나 지금은 탈퇴 혹은 졸업하여 평범한 사회인으로서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라는 걸 알 수 있다. 그런데 회의를 주도하던 연출자, 그녀의 눈빛이 흔들리고 있다는 걸 우린 알게 된다. 사건은 이때부터 시작된다. 남자가 기차에서 내리자, 회의를 주도하던 연출자도 갑자기 내린다. 그녀가 남자를 갑자기 뒤쫓기 시작한다. 차비도 없이 무작정, 친구들은 달리는 기차에 두고, 토론은 중지되고 내버려 둔 채로, 그녀는 기차에서 내려 남자를 쫓아가는 것이다. 그녀의 돌발 행동의 이유를 짐작하는 게 어려운 일은 아니다. 그들은 과거에 사랑하는 사이였을 것이다. 여행 중이어서 불참하게 된 감독을 대신하여 GV에 참석한 촬영 감독은 “화면들을 쪼개서 공간을 창조해보고 싶었다.”거나, “사회 안에서 아주 개인적인 것조차 챙기지 못하게 되는 상황”에 대해서 언급했다. 하지만 가장 돋보이는 장면은 남자가 작별의 말을 던지고 등을 돌려 떠나고 여자가 화면의 빈자리 한쪽에서 오래 머무는 그 순간이다. 그 장면에서의 공간적 공백과 시간을 버틸 줄 아는 담력, 그 담력으로 인물의 감정을 우리에게 닿게 하는 능력이 이 영화의 진정한 매력이었다. 감독의 나이가 20대 중반이라고 누군가 내게 알려주었을 때 나도 모르게 그만 “나이답지 않은 깊은 연애를 해본 건 아니겠느냐”고 하나마나한 소리를 했다. 하고 보니 그런 소리를 하게 만드는 것도 이 영화의 매력이지 싶었다. 다행히 다소 바보 같은 내 물음에는 아무도 답하지 않았다.

11.22

온종일 영화를 보았다. 그런데 어제의 두 배에 해당하는 분량을 보았지만 어제만큼 좋은 영화는 거의 없었다. 영화과 전공자의 작품이라고 되어 있지만 도저히 그걸 믿을 수 없는 영화들도 몇 편 있었다. 개인적으로는 이날 본 영화들 중 김종한 감독의 <영 아일랜드>가 가장 인상 깊었다. 한 남자가 건널목에 오래 서 있다. 그의 보이스 오버 내레이션이 흘러나온다. 남자는 얼마 전 중학교 1학년 때 친구를 우연히 만나 그 시절을 회상하게 된 것이다. 그러자 그의 중학생 사진이 화면을 채운다. 학급의 앞 줄 쯤에서 까불며 앉았을 법한 귀여운 상이다. 이제 그 시절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깡년이’라고 불리던 돈 뜯어가던 무서운 누나들, 얼굴이 찢어지도록 두들겨 패던 기술 선생, 그 시절 나라를 쥐고 흔들던 무서운 독재자, 하지만 어린 중학생을 홀리고 흥분시키던 삼류극장들. 과거의 기억과 자료들과 현재의 풍경들과 현재 한국사회에 대한 논평 등이 이리 저리 뒤섞이며 회한이 되었다가 푸념이 되었다가 비판이 되었다가 하기를 반복한다. 이 영화는 그런 거친 직설과 정한이 매력이다. <영 아일랜드>가 능숙하다는 인상을 전하지는 못하고 있지만 적어도 시원하고 솔직하다는 인상은 충분히 전한 것 같다. 그런 거친 직설이 때론 힘이 세다. 상영이 모두 끝난 늦은 밤 ‘부산독립영화인의 밤’이 열렸다. 몇 사람을 만났고 또 술이다.

11.23

img298저녁 6시, 심사를 위해 심사위원들이 모두 모였다. 대상에 해당하는 영화주먹상에는 최정문 감독의 <신탄진>, 심사위원 특별상 2편에는 김수지 감독의 <나는 집으로 간다>, 김나영 감독의 <Running Photos>가 수상했다. 기술창의상에는 박수민 감독의 <저녁식사>, 배우 2인 부문에는 <신탄진>의 주연 여배우 박세제, <나는 집으로 간다>의 주연 여배우 팽지인이 수상했다. 어떤 작품은 수월하게 서로 동의됐지만 어떤 작품은 다소 논쟁에 부쳐졌다. 특기할 만한 것은 원래 남녀 배우 한 명씩에게 주어야 하는 상을 여배우 두 명에게 몰아주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의외로 이 예외적인 결정은 심사위원들 사이에서 쉽게 동의됐다. 좋은 남자 배우 그리고 그들의 좋은 연기가 있었지만, 도저히 둘 중 한 명을 제외할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난 연기를 보인 두 여배우 모두에게 상을 주는 것이 맞겠다고 심사위원 전원이 판단했다. 그 중에서도 개인적으로는 <나는 집으로 간다>의 팽지인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녀에 관한 정보가 전혀 없던 나는 그녀가 화면에 등장하여 모든 공기를 장악할 때 잠시 내가 잘못 본 것이 아닌가 의심이 들 정도였다. 그녀의 눈빛과 몸짓은 영화에 생기를 불어 넣고 있었다. 이 여배우에 관하여 내가 칭찬을 늘어놓을 때 주변의 반응은 그럴 줄 알았다는 분위기다. 원래 유명하다고 그들은 말해 주었다.
한편, 스물다섯 편의 부산독립영화, 더 정확히 말하면 부산독립영화를 이끌어갈 젊은 인재들의 단편영화들을 보면서 두 가지 정도의 경향이 있음을 알게 됐다. 첫 번째는 가족과 연애와 청춘과 성장에 관한 영화들이 많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이 경우는 특별하지 않다. 두 번째가 정말 특별해 보였다. 이상하게도 ‘어떤 상실이나 변질에 관한 기록이나 후일담에 관한 영화들’이 도드라져 보였다. 극영화와 다큐멘터리 구분 없이 혹은 긍정이든 부정이든 각자의 방식으로 그런 점들이 드러났다. 상실되어 가고 있는 공간이나 사물들(<만덕>,<당산>), 상실되어 버린 사람들 혹은 사랑들(<9월 9일>, <신탄진>, <영자씨>), 변질되어 버린 정의들(<영 아일랜드>). 이것이 지금 부산의 젊은 독립영화 감독들이 느끼는 예민한 현실인지 혹은 나 개인의 상상적 감상에서 비롯된 것인지 아직은 잘 모르겠다. 다만 최근에 부산독립영화계를 이끌고 있는 부산의 기존 다큐멘터리 감독들이 하나같이 상실되어가는 공간과 지역성에 관심을 두고 있는 것과 막연하게나마 연결되어 있는 것은 아닌지 문득 생각하게 됐다

11.24

낮 12시 즈음 부산역에 도착했다. 기차를 탔는데 하필이면 보통 기차보다 40분이나 더 걸리는 걸 탔다. 어쩐지 기차 값이 다른 것에 비해 훨씬 싸더라니. 시간이 오래 걸려서 사람들이 피했기 때문일까. 역 몇 개를 지나고 나니 객실에 나 혼자뿐이다. 갑자기 영화 <신탄진>이 잠시 생각났다. 그리고 신탄진이 어디 있는 곳인지 내가 모른다는 것도 떠올랐다. 지도를 찾아보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기차에서 내렸고 서울은 부산보다 더 추웠다. 나는 집으로 갔다.

bfc


Gallery

많이 읽은 글

최근 포스트

인기 필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