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의 영화산업 육성정책에 대한 재검토 역시 필요하다. 짧은 시간에 국내외의 영화·영상산업 환경은 급변하였다.
‘영화도시 부산’의 어제
‘영화도시 부산’의 역사는 우리 예상보다 훨씬 더 오래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특히 우리나라 영화제작사의 효시로 일컬어지는 조선키네마주식회사 (1924년 설립)와 해방 전에 만들어진 우리 영화 중 가장 중요한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는 나운규의 <아리랑>(1926) 등은 부산이 자랑할만한 영화유산으로 손꼽을 수 있다. 한국전쟁 당시에는 임시수도였던 부산에 전국의 영화인들이 모여들면서 잠시 동안이었지만 부산은 우리 영화의 중심지 역할을 담당하기 도 했다. 이런 역사 덕분에 부산은 지난해 아시아에서 최초로 유네스코 영화 창의도시로 지정될 수 있었다.
하지만 부산이 자타가 인정하는 영화의 도시로 자리 잡게 된 것은 1990년대 후반부터였다. 1996년 9월 13일, 제1회 부산국제영화제의 개막과 더불어 부산은 영화의 도시로서 본격적인 첫걸음을 내딛게 된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것처럼 부산국제영화제는 국내에서 개최된 최초의 국제영화제였다. 당시 한국영화계는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왜소했다. 그렇기 때문에 부산국제영화제의 미래를 낙관적으로 전망한 사람은 극소수였다. 하지만 영화제에 대한 반응은 영화제를 준비한 당사자들도 미처 예상하지 못했을 정도로 뜨거웠고, 그 열기에 힘입어 부산은 영화의 도시로서 국내외 영화인들에게 이름을 알릴 수 있었다.
부산국제영화제와 더불어 영화의 도시 부산을 이끈 또 다른 공로자로 부산영상위원회를 꼽아야 할 것이다. 1999년에 설립된 부산영상위원회는 국내 최초, 아시아에서 두 번째로 설립된 영상위원회로 부산에서 촬영되는 영화에 대한 제반 지원 업무를 제공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기구였다. 해외에서는 오래전부터 영화촬영을 유치해서 도시 홍보나 도시 재생에 활용하곤 했지만, 국내에서는 지자체가 직접 영화촬영을 지원한다는 것이 아직 생소하게 받아들여지던 시기였다. 하지만 부산영상위원회가 활동을 시작한 이후, 영화촬영유치가 도시의 브랜드 가치 상승효과는 물론 지역 경제 활성화에도 도움이 된다는 사실이 확인되면서 국내 지자체들은 앞 다투어 지역 영상위원회를 설립하게 된다.
정책적인 지원에서도 부산은 다른 지자체들보다 한발 앞서 나갔다. 영화를 미래 전략산업으로 선정한 부산시는 독자적으로 지역 영화산업 육성에 나섰다. 2001 년에는 부산영화촬영스튜디오가 건립되었고, 2002년에는 영화 관련 기업들을 인큐베이팅 하기 위한 영상벤처센터가 건립되는 등 과감한 투자가 이어졌다. 또한 2005년에는 지역 영화산업을 육성하기 위한 종합적이고 장기적인 계획을 담은 ‘시네포트 부산’이 발표된다. 이처럼 19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초반에 이르는 시점의 부산영화계의 행보는 도전적이며 독립적이며 진취적이었다.
‘영화도시 부산’의 오늘
한국영화는 최근 몇 년간 최고의 호황을 누리고 있다.1) 2014년에는 사상 최초로 매출액이 2조 원을 넘어섰으며, 총 관객 숫자도 2억 명을 넘어섰다. 지난해 우리나라 국민들의 1인당 영화 관람 횟수는 4.19회로 세계 최고 수준에 도달하였으며, 한국영화의 시장 점유율 또한 50.1%로 4년 연속 50%를 넘어섰다. 투자 수익률에도 변화가 나타났다. 2008년 –43.5%를 기록할 정도로 한국영화의 수익률이 악화되기도 했지만, 2009년을 기점으로 상승세로 전환하더니 2012년부터는 흑자로 전환되었다. 비록 지난해에는 수익률이 전년 대비 14.1% 급락했지만 흑자 기조는 유지되고 있다.
한국영화가 호황을 누리는데 반해 부산의 영화산업은 쉽사리 반등의 기회를 잡지 못하고 있다. 영화산업 통계 자료를 살펴보면, 부산이 국내 영화산업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여전히 낮다. 이것은 국내 영화산업 인프라가 대부분 수도권에 집중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를 개선하기 위해 수도권 영화사를 부산으로 유치하려는 노력도 있었다. 하지만 이미 한국영화계가 멀티플렉스 체인을 기반으로 한 대기업 중심으로 재편된 상황에서 수도권 영화사를 유치하려는 노력은 가시적인 성과를 기대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지자체들 사이의 경쟁 구도 역시 심화되고 있다. 특히 서울시의 움직임이 시선을 끈다. 사실 서울은 국내 영화계의 인프라 대부분을 독점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영화도시라는 이름을 부산에 선점당한 바 있다. 하지만 최근 부산영화계가 내홍을 겪고 있는 사이에 서울시는 서울을 아시아 대표 첨단영화중심지로 조성하는 내용을 담은 ‘영화 문화산업 발전 종합계획’을 발표했다. 서울시의 계획을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2018년 충무로 인근에 5,000㎡ 규모의 서울 시네마테크를 건립하고, 7,000㎡ 규모의 실내스튜디오와 도심형세트장을 조성하여 영화제작 교육 프로그램 운영 및 한류와 연계한 전시·체험시설로 활용한다고 한다. 또한 상암DMC를 중심으로 한 영화클러스터를 조성하고, 경기도 고양·파주-서울, 상암·여의도-인천을 잇는 글로벌 영화창작벨트를 구축한다는 계획도 발표하였다. 더불어 독립·예술영화를 육성하기 위해 독립·고전·예술영화전용관을 2018년까지 3곳으로 확대하고, 500억 원 규모의 영화펀드를 조성하여 창작자들의 활동을 지원한다는 것이 주요 내용이다. 서울시의 계획은 지원 대상과 사업 내용이 상당히 구체적일뿐만 아니라 영화제작지원 펀드의 규모도 예상보다 크다는 점에서 눈길을 끈다.
물론 서울시가 내놓은 육성방안 자체가 새로운 것은 아니다. 이 사업들 중 상당수는 부산이 이미 시행하고 있거나 시행 예정인 사업들이기도 하다. 그래서 혹자는 서울이 부산의 정책들을 모방한 것이 아니냐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정책에서 중요한 것은 ‘누가 먼저 했는가’가 아니라 ‘누가 더 잘 하는가’일 것이다. 최근에도 서울시는 영화계의 해묵은 숙제였던 ‘인디스페이스’와 ‘서울 시네마테크’의 공간 문제를 단숨에 해결함으로써 영화계의 주목을 받은 바 있다. 그동안 지역 영화정책분야에서는 독주체제를 구축하고 있었던 부산으로서는 결코 만만치 않은 경쟁자를 만난 셈이다.
‘영화도시 부산’의 내일
이런 위기요인들에도 불구하고 부산영화계의 미래를 낙관적으로 바라보게 하는 긍정적인 지표들도 적지 않다. 우선 부산이 여전히 최고의 영화촬영지로 인정받고 있다는 사실을 꼽을 수 있다. 부산영상위원회에 따르면, 2011년부터 지난해에 이르기까지 최근 4년간 부산에서 촬영된 영상물의 숫자는 지속적으로 늘어나고 있다. 지난 한 해 동안 부산지역 영화촬영유치 편수는 총 92편으로 역대 최고 수치를 기록했다. 이 중 장편극영화가 35편, 드라마·CF 등을 포함한 영상물이 57편으로, 2013년과 비교할 때 총 촬영 편수는 14편, 장편극영화 편수는 11편 증가하였다.2)
해외작품의 촬영 역시 2012년 이후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특히 중국영화의 촬영 편수가 증가하고 있다는 사실이 주목할 만하다. 부산영상위원회측은 중화권에 부는 한국영화 콘텐츠의 판매 붐과 함께 한중 공동제작 펀드 조성 등의 호재에 힘입어 중국영화 촬영 편수가 당분간 꾸준히 증가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영화촬영지로서 부산의 강점은 그동안 국내외 영화촬영을 지원하면서 축적한 노하우와 민관 네트워크 그리고 시민들의 우호적인 태도를 꼽을 수 있다. 또한 도심에 배우들이 지낼 수 있는 숙박시설과 촬영스튜디오를 모두 가지고 있다는 사실도 영화촬영지를 선택하는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매력적인 요소라고 할 수 있다.
오랜 진통 끝에 들어선 부산창조경제혁신센터에 대한 기대도 크다. 아직 구체적인 사업 내용이 결정되지는 않았지만, 혁신센터 주관 기업인 롯데의 네트워크와 노하우, 그리고 이 사업을 위해 조성될 자금과 기반시설 등을 잘 활용한다면 부산영화계는 지금과는 사뭇 다른 모습으로 변모할 수 있을 것이다.
잠시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올해로 20회를 맞이하게 되는 부산국제영화제는 여전히 영화도시 부산의 가장 중요한 영화적 자산이다. 또한 2011년 건립된 세계 최대의 예술영화관 ‘영화의전당’ 역시 부산의 영화문화를 풍요롭게 만드는데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창조산업인 영화산업에서 인적자원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 한때 침체기를 보냈던 부산독립영화협회가 2014년 사단법인화를 완료하였다는 사실은 부산영화계에 다시 사람들이 모이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이런 기회요인들을 충분히 활용하기 위해 준비해야 할 것들을 몇 가지 살펴보며 글을 맺으려고 한다.
먼저 영화촬영지로서 부산의 위상을 더욱 공고히 다지기 위해서는 촬영지원시설과 장비에 대한 투자가 필요하다. 특히 현재 부산영화촬영스튜디오는 가동률이 포화 상태에 이르렀으며, 국내외의 대작들을 수용하기에는 규모도 작은 편이다. 새로운 스튜디오의 건립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
인력양성도 중요하다. 특히 고급 기술 인력의 관리와 양성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지금까지는 지역의 영화·영상 관련 학과에서 배출되는 영화인력들이 대부분 수도권으로 유출되곤 했다. 만일 부산에서 촬영되는 영화에 지역 영화인들이 안정적으로 참여할 수 있다면 지역 인재의 유출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지역 스탭을 고용하는 영화에 더 많은 지원을 하는 방안을 고민해볼 수 있을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다양한 재교육 프로그램이 마련되어야 하며, 부산에서 활동하는 제작인력 관련 DB 구축도 필요하다. 또한 해외 촬영팀과 지역 영화인들을 연결할 수 있는 전문 코디네이터도 육성해야 한다.
부산의 영화산업 육성정책에 대한 재검토 역시 필요하다. 짧은 시간에 국내외의 영화·영상산업 환경은 급변하였다. 종합적이고 장기적인 관점에서 지역 영화계의 경쟁력을 높일 수 있는 새로운 마스터플랜을 수립할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1990년대 후반과 2000년대 초반까지 부산영화계가 보여주었던 도전 정신을 회복하는 것이다. 부산국제영화제, 부산영상위원회, 시네마테크 부산, 영화의전당 등은 새로운 발상과 과감한 도전의 결과물들이었다. 그때의 정신을 회복한다면 1990년대 후반, 부산의 도전이 한국영화계를 놀라게 했던 것처럼 21세기의 부산도 부산영화, 더 나아가 한국영화를 변화시키는 주역으로 자리 잡을 수 있을 것이다.
1) 이하 통계 수치는 영화진흥위원회의 자료들에 근거한 것임. 2) 출처 : 부산영상위원회 홈페이지(www.bfc.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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