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치마킹과 리메이크와 오마주라는 ‘한국영화의 어떤 모방성’을 말하기에 앞서 이 영화들을 언급하게 됐다.
<군도:민란의 시대>(이하 <군도>)<명량><해적: 바다로 간 산적>(이하 <해적>)이라는 세 편의 한국형 블록버스터들이 차례로 2014년 여름을 휩쓸고 지나갔다. 흥행 면에서 승리자는 단연 <명량>이었다. <명량>은 관객수가 1,700만 명을 넘어서면서 한국영화 역대 흥행작 1위에 올랐다. <군도>는 관계자들의 기대만큼 관객을 모으진 못 했지만 그래도 500만 명 가까이 갔고, <해적>은 700만 명이 넘는 걸출한 성적을 냈다. 새삼스럽게 이 세 편의 흥행 성적을 다시 논하려는 것은 아니다. 작품성을 기준으로 세 편을 다시 평가하려는 것도 아니다. 일단 개인적으로 올 여름의 한국형 블록버스터들을 다시 거론하는 것 자체가 몇 가지 이유에서 그다지 반갑지 않다. 다만, 벤치 마킹과 리메이크와 오마주라는 ‘한국영화의 어떤 모방성’을 말하기 에 앞서 이 영화들을 언급하게 됐다. <해적>이 우리들의 첫 번째 사례이기 때문이다.

<해적: 바다로 간 산적>(2014)
1.첫 번째 모방, 벤치마킹.
할리우드영화를 모델로 삼은 한국영화의 벤치마킹 사례는 확실히 대기업의 영화계 진출과 맞물려 최근 몇 년 사이 더 뚜렷해진 것 같다. 물론 충무로의 토착 제작사들이 벤치마킹에 아예 무관심했던 것은 아니다. 명필름이 일찍이 제작했던 <해가 서쪽에서 뜬다면>은 할리우드 스포츠영화와 로맨틱 코미디영화를 적절히 혼합한 긍정적인 벤치마킹의 사례였다. 늘 그러한 긍정적인 사례만 있었던 건 아니었지만 적어도 그때에는 제작 집단의 미적 관심이나 취향의 문제가 얼마간 중요한 동기로 보였다. 반면에 요즈음은 지향이 다른 것 같다. 제작진의 미적 도전이나 영화적 취향이 전제되기보다는 흥행을 위한 노골적인 셈법이 더 확실한 목표가 된 듯 하다. 특히 블록버스터의 경우에 종종 그 셈법이 가장 우선시되는데, 목표가 강고해지면서 상대적으로 작품의 질이 떨어진 벤치마킹의 가장 근접한 사례가 <해적> 인 것 같다. 이 영화가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캐리비안의 해적> 시리즈를 벤치마킹했다는 건 누구라도 알아차릴 수 있다. 어쩌면 우리에게는 이 영화가 <캐리비안의 해적>보다 훨씬 더 근사한 대중물이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엉터리 해적을 주인공으로 한 스펙터클 모험극은 우리들의 사극으로 전환되기에 좋은 소재였다. 그런데 여기 까지다. <해적>의 이야기는 느슨하고 인물들은 매력이 부족하며 배우들은 제 역할을 못하거나 소비되고 있다. 규모가 강조되고 볼거리도 화려하지만 그것이 이 영화의 질을 높이진 못했다. 더군다나 모방이 창의를 낳지 못했다. <해적>이 흥행에서 대성공하기는 했으나 개인적으로는 이 영화를 성공작이라 부르지 못하겠다. <군도>와 <명량>과 <해적> 중 어느 영화가 더 좋고 나쁜가를 말하려는 그런 것이 아니다. 한국형 블록버스터의 주요한 전략 중 하나인 벤치마 킹이라는 모방적 시도가 그 어떤 창작에의 간절함이나 호기심 가득한 내적 동기화 없이 그저 상업적 성공을 위한 외적 수단으로만 쓰이고 있는 것은 아닌지 묻고 있는 것이다. 이 모방은, 우려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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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족구왕>(2013)
2. 첫 번째 모방 벤치마킹의 두 번째 사례.
2013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족구왕>은 적잖은 파란을 일으켰다. <족구왕>은 같은 학교를 졸업한 친구들 몇 명이 모여 작은 제작사를 차리고 서로 품앗이 하는 것처럼 만든 저예산영화다. 감독 우문기는 각본가이자 제작자인 김태곤에게서 닭발 하나 사주고 영화 제목과 시나리오를 받았으며, 아는 배우들을 부르고 최소한의 예산을 들여 이 영화를 만들었다. 그러고 나서 우리가 이른바 일본 청춘영화라고 부르는, 일본 대중물의 어떤 전통, 그러니까 수오 마사유키 감독의 <으랏차차 스모부>(1992), 야구치 시노부 감독의 <워터보이즈>(2001)등의 장르적 인물과 성격을 한국식으로 번안하되 그 소재를 족구로 바꾸어서 재치를 발휘했다. <해적>과 같은 블록버스터영화와 가장 멀리 있는 것처럼 보이는 영화이지만 규모가 작을 뿐 실은 전략이 같은 경우다. 이 영화의 전략도 엄연히 벤치마킹이다. 그런데 벤치마킹이라는 모방적 시도에 관한 한 <족구왕>은 긍정과 부정의 감정을 동시에 일으킨다. 철저하게 편향적 취향에 입각한 이 영화의 쾌활하고 유머러스한 모방 창작의 시도가 오히려 창작자의 드문 고집으로 보여 긍정적으로 느껴지다가도, 이런 시도 또한 시간이 지나 자본과 결합하게 되면 또 다른 속빈 강정이 되는 것은 아닐까 우려되기도 한다. 이 모방은 아직, 낙관적이며 동시에 비관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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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사랑 나의 신부>(2014)
3. 두 번째 모방, 리메이크.
10월 중 임찬상 감독(이하 임찬상)의 <나의 사랑 나의 신부>가 개봉할 예정이다(혹은 독자가 이 글을 읽는 시점에 영화는 이미 개봉되었는지도 모른다). 이명세 감독(이하 이명세)의 1990년 동명 영화를 리메이크한 것이다. 박중훈이 맡았던 역할을 조정석이, 故최진실이 맡았던 역할을 신민아가 한다. 우리는 종종 이러한 리메이크 작품을 만난다. 2014년에도 프랑스 원작 영화를 리메이크한 한국영화 <표적>을 만난 바 있다. 한국영화가 외국영화를 혹은 외국영화가 한국영화를 리메이크하는 경우는 더러 있지만 한국영화가 한국영화를 리메이크하는 일은 생각보다 많은 편이 아니어서 <나의 사랑 나의 신부>와 같은 경우는 사실 희귀하다. 그걸 보는 우리의 인상은 한국영화가 프랑스영화를 리메이크할 때의 인상과 다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여기에는 우리들의 문화적 시대적 공기 혹은 분위기이라는 것이 스며든다. 그렇다면 1990년 <나의 사랑 나의 신부> 의 그 장면들은 2014년에 말 그대로 어떻게 ‘새로 만들어졌을’ 것인가. 오해에 휩싸인 남편이 홧김에 짜장면을 먹는 아내의 얼굴을 그릇에 처박은 그 유명하고도 우스꽝스러운 장면은 영화에 필시 재등장할 것이다. 그 장면은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리메이크라는 창작 행위가 사실상 원작에의 존중에 바탕한 창조적 모방 행위라는건 재론할 필요가 없다. 아주 기발하고 유능한 창작자들만이 드물게 모방이라는 한계를 훌쩍 벗어나 자기의 것으로 완전히 ‘새로 만들 뿐’, 대부분은 원작이 지닌 미덕들을 리메이크작도 지니기를 그 스스로 바라게 된다. 그렇다면 임찬상의 <나의 사랑 나의 신부>도 그런 미덕을 갖게 될까. 이 영화의 신부는 어떻게 창의적으로 우스꽝스러운 가운데 짜장면 그 릇에 코를 박게 될 것인가. 이 모방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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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세 번째 모방, 오마주.
임찬상의 <나의 사랑 나의 신부>가 리메이크하 는 이명세의 <나의 사랑 나의 신부>가 바친 그 오마주. 개인적으로는 이명세 영화의 많은 작품을 좋아하는 한편 또 어떤 작품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입장인데, 가장 좋아하는 영화는 아니지만 <나의 사랑 나의 신부>는 전자에 속한다. 이 영화가 리메이크된다고 했을 때 이런 질문이 가장 먼저 떠올랐다. 혹시 이명세가 <나의 사랑 나의 신부>에서 중시 했던 그 오마주의 기운도 새 영화에서 리메이크될 수 있는 것일까. <나의 사랑 나의 신부>에 어떤 오마주가 있는 것이냐고 묻는다면 일본의 거장 감독 오즈 야스지로(이하 오즈)의 영화를 떠올려보기를 권한다. 이 영화의 어떤 장면들은 은근히 오즈 영화의 장면을 닮고 싶어 하며 그 정서를 흠모하고 있다. 조용한 세트에 가득 차 있는 인공성, 지나 가는 기차, 펄펄 끓는 주전자, 가끔이지만 카메라에 정면으로 마주하는 인물들, 그리고 순환적 계절을 따라 흐르는 인생사에서 그런 걸 느낄 수 있다(이명세는 때때로 거장들의 영화에 오마주를 바치는 행위를 매우 중시하는데, 그가 꿈에서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의 계시를 받아 연출을 결심했다는 영화 <M>(2007), 이 영화의 현장에서 실제로 형광펜으로 줄쳐져 있는 히치콕의 평전을 옆에 두고 있는 그를 본 적도 있다). <나의 사랑 나의 신부>에서 오즈를 닮고 싶어하던 이명세의 미적 열망의 모방적 자세를 긍정하기 위해 오마주라는 말을 썼다. 개인적 으로는 오마주라는 행위를 선호하는 편이 아니지만, 어떤 창작자들의 경우 오마주를 긍정의 차원으로 끌어올리는 것은 사실이다. <나의 사 랑 나의 신부>도 어느 면에서는 그렇다. 오즈를 의식하여 만든 그 장면들이 비범해서가 아니다. 오즈를 의식한 행위 안에, 그 모방의 행위 안에, 이명세라는 당대의 젊고 패기 넘치는 한 창작자의 미적 흠모와 치열함이 솔직한 감정으로 담겨 있는 것 같아 인상적이라는 것이다. 적어도 <나의 사랑 나의 신부>에서 오마주라는 그 모방 행위는 한 창작자의 순수한 미적 관심이 촉발한 것이었다. 그렇다면 다시 궁금해진다. 새로 만들어지는 영화에서 이 모방도 모방될 수 있는 것인 가. 아니, 지금은 이렇게 말하는 편이 더 맞겠다. 지금에 와서 문득 돌아보니, 이명세의 <나의 사랑 나의 신부>의 이 모방은 갸륵하다. 이 모방은,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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