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의 왜곡된 구조를 바로 잡는 영화(부산영화)를 생산해내야 한다. 그래서 먼저 ‘부산영화’란 무엇인지에 대해 고민하고 의문을 달아야 하는 것이다.
‘부산영화’란 무엇인가
부산을 다루고 있는 영화들을 보면 주로 서면, 남포동, 영도대교, 범일동, 해운대, 광안대교 등의 공간이 등장하고 있다. 관객들은 일반적으로 위의 공간들이 등장하는 영화를 ‘부산영화’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영화에 부산 공간이 등장한다고 해서 부산 사투리를 사용한다고 해서 ‘부산’의 모습을 보여주 는 것은 아니며 ‘부산영화’라고 지칭될 수도 없다. 그럼에도 ‘부산영화’라는 개념은 하나의 장르라도 된 것처럼 무분별하게 사용되고 있다. 도대체 ‘부산영화’는 무엇이며 또 ‘부산영화’라는 것이 있기는 한 것인가? 다시 말해 영화 속에서 부산 공간이 주 무대이거나 부산사람이 등장하거나 부산사투리를 사용한다고 ‘부산영화’라고 정의내릴 수 있을까? ‘부산영화’라는 개념은 문제적이라고 보인다. 우리는 서울에서 부산으로 로케이션 온 영화를 무분별 하게 부산영화라고 지칭한다. 그렇다면 부산에서 작업하는 감독들이 만든 영화는 무엇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독립영화? 예술영화? 엄밀히 따지면 ‘메이드인 부산’ 영화만이 ‘부산영화’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제작 주체가 부산일 경우에 한해 부산영화라고 해야 타당한 것은 아닐까. 단지 로케이션을 어느 지역에서 했다고 영화에 지역 이름을 갖다 붙인다면 대구 사투리를 쓰고 대구에서 영화를 찍으면 대구영화, 인천에서 찍으면 인천영화가 될 수 있다. 뉴욕에서 찍은 할리우드 영화가 뉴욕 영화로는 불리지 않는다. 그런데 유독 부산만은 ‘부산영화’ 라는 명칭을 붙이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한다. 서울에서 부산으로 로케 온 영화를 부산영화가 아니라고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여기서 ‘부산공간’을 이미지화할 때의 문제를 거론하고 싶다. 나는 부산토박이로 영화 속에 등장하는 부산 공간을 볼 때마다 답답함을 느낀다. 부산영화 속에 등장하 는 부산 공간은 강렬한 지역적 색깔을 내포한 주변 부 도시로만 등장하기 때문이다. 부산은 하루가 다르게 ‘변화 중’인 도시지만 영화 속에 보여지는 부산은 늘 똑같은 모습으로만 재현되고 있다. 부산을 다루고 있는 영화들은 남성들의 폭력(성)이 나 부산사투리만을 줄기차게 보여주고 있다. 영화 속 부산 이미지야말로 역행하는 부산을 알리려는 의지를 담고 있는 것은 아닐 런지. 다시 말해 이들 영화는 부산공간의 균열적인 면과 특질적인 면을 담아내지 못하고 부산을 한 가지의 공통적이고 단일한 모습으로 묶어 내려는 의도가 있는 것이다. 나는 이들 영화에 ‘부산’이라는 이름을 걸지 말았으면 좋겠다.
부산영화 속 부산의 이미지
부산영화라고 불리는 영화들에서는 ‘부산’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들을 나열함으로써 중심/주변이라는 이분법적 논리를 강화시킨다. 이는 부산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현실에 당면한 문제에 관심을 가지지 않은 채, 관료중심의 논리에 의해서 부산이 재현되고 있기 때문에 발생한 문제이다. 그로 인해 부산영화에는 더 이상 ‘부산은 없고’ 부산이라는 도시를 단일한 이미지로 구속시킨다. 부산영화라고 불리는 영화에서 부산 공간을 다룰 때 빠지지 않고 말하는 것이 몇 가지 있다. 그것은 부산이 도시ㆍ바다ㆍ산을 가진 최적의 로케이션 장소라는 점이다. 이 최적의 장소에서 감독들은 부산의 과거와 미래를 오고가며 이야기를 만든다. 이때 가장 많이 활용되는 이미지가 바로 애잔한 ‘향수’와 강인한 ‘남성성’이다. 쉽게 말해 ‘신파’와 ‘조폭’의 공간으로 부산이 표현된다는 것이다. 특히 2000년 대 이후로 부산을 다루는 영화들에서 이런 모습이 기하학적으로 늘어났다. 부산영화를 대표하는 작품 으로는 곽경택 감독의 <친구>(2001)와 윤제균 감독의 <해운대>(2009)를 들 수 있다. 두 작품 모두 부산 공간을 통해 이야기가 진행되며 또 흥행에 성공한 영화다.
2000년 초반 등장한 영화 <친구>는 관객들의 열렬한 호응을 얻었다. <친구>가 성공한 이유는 1970년 대 고등학교를 다녔던 관객들에게 향수를 불러일으키는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이는 부산사람들만의 감성이 아닌 모든 사람들의 보편적인 정서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영화 초반부 ‘친구’들이 고등학교를 다닐 때의 모습, 이소룡의 브로마이드, 촌스러운 발음의 영어선생, 불량학생들의 아지트 롤러장은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끌어낼 수 있는 에피소드일 것이다. 또한 영화 속에 등장하는 부산 공간은 자갈치 시장, 남포동, 수정동 일대의 산동네 등이다. 이 일대는 해운대나 서면보다 덜 발달된 곳이면서 부산 사람들에게는 애환이 많은 동네이다. 남포동의 경우 아직도 옛 기억과 추억이 잘 보존되어 있으며 그 시절 건물들이 곳곳에 남아있다. 이 이미지들은 영화 속에서는 충분히 재현되고 소비된다. 그리고 남포동 일대의 덜 발달된 공간 덕택에 부산은 조폭들의 은신처 향수어린 공간이 되기에 충분했다. 후반부의 조폭 이야기가 진정성을 얻을 수 있었던 것도 이런 장소의 특이성 때문이다. 그 후 부산의 이미지는 <친구>가 보여주는 방식대로 자주 차용된다. 영화 <친구>의 성공 이후 <친구>에 등장한 ‘의리 있는’ 남자는 ‘부산남자’의 이미지가 되어 영화 속에서 나타난다. 부산남자의 이미지를 극대화하여 보여주고 있는 작품으로는 <첫사랑 사수궐기 대회>(오종록, 2003), <사생결단>(최호, 2006), <사랑>(곽경택, 2007), <부산>(박지원, 2009) 등이 대표적이다. 영화 속 남성은 폭력적이고 거칠지만 한없이 단순하고 의리 있는 남성으로 표현된다. 이들은 수정동과 남포동 등지에 살고 있으며 낡고 오래된 공간을 통해 긍정적인 효과(긍정적 인물)를 얻게 된다. 다 시 말해 영화는 마초적 남성의 모습을 낭만화 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2009년에 제작된 드라마 ‘친구, 우리 들의 전설’(연출 곽경택, 김원석, 2009)을 기억할 수 있다. 이 드라마는 영화 <친구>의 이야기를 그대 로 차용했음에도 불구하고 시종일관 낮은 시청률로 고전을 면치 못하며 종영했다. 영화와 동일한 감독 (연출자)에 동일한 이야기를 하고 있어 성공을 예상 했겠지만, 이제 관객의 정서는 달라졌다. 드라마는 조폭을 다루는 여타의 영화와 별 차이가 없어 보였다. 물론 드라마는 부산이라는 공간이 조폭들이 활약할 수 있는 최상의 공간(부산에서 일본으로 쉽게 떠날 수 있는 위치)임을 알려주었고, 이로 인해 부산은 더욱 매력적으로 보였다. 하지만 이미 시청자들은 욕설이 난무하고 남성성이 극대화된 조폭영화를 수도 없이 많이 만나왔다. 이 드라마가 실패한 이유는 영화 <친구>에서 보여주었던 애잔한 향수보다는 조폭의 문제에 더 관심을 가졌기 때문이다. 인간의 보편적 정서, 그들의 삶을 보여주지 않는 이야기는 실패할 수밖에 없음을 단면적으로 보여준 것이다. 물론 드라마가 인간의 삶에 대해 이야기 했다하더라도 그 정서에 몰입할 수 있었을까는 의문은 들지만 말이다. 부산은, 아니 시대는 변해가는 중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지점에서 영화 <해운대>를 살필 수 있다. 영화는 부산이 등장하는 영화에서 쉽게 볼 수 있는 ‘회상-기억’의 방식이 아니라는 점에서 이제껏 부산영화를 다루는 방식과 다른 지점에 있다.1) 영화 속에서 부산 ‘해운대’라는 공간은 ‘관광의 공간’이 아니라, 공포를 보여줄 수 있는 ‘미래의 공간’으로 묘사되기 때문이다.

일상을 거부하는 부산영화
이제껏 부산영화라고 불린 영화들에는 부산의 지역성, 부산의 다양한 면(다양성)을 소멸시키고 조폭 이야기나 70-80년대 감성을 자극하는 영화가 대부분이었다. 이 영화들에서 부산은 중요하지 않고 서울보다 못한 부산의 모습을 주지시킬 뿐이었다. 부산 영화 속 부산은 서울보다 후미진 곳만 있는 동네인 양 등장했고, 그곳이 마치 부산의 모든 것인듯 보였다. 여기서 영화 <해운대>는 기존의 영화와 다른 방식으로 부산을 바라보게 해 긍정적이지만 영화 <해운대> 또한 부산의 이미지를 고정시키고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영화 <해운대>는 몇 가지 이미지들로 부산 이미지를 단정 짓고 있다. ‘자이언츠 야구’ ‘해운대 해수 욕장’ ‘해운대시장’ ‘달맞이언덕’ ‘이기대’ ‘사투리’ ‘누리마루’라는 이미지들이 대표적이다. 이 이미지들은 부산에 실제로 존재하고, 부산을 대표하 는 상(像)들이다. 그런데 문제는 영화 속에서 이 이 미지들을 통해 부산이라는 도시를 쉽게 정의 내리려고 한다는 것이다. 이는 부산을 상품화 시키는 부산시청의 행보와 동일하다. 영화 개봉 뒤 부산시청 직원들은 <해운대>가 부산의 영화라도 되는 것처럼 단체관람에 열을 올렸으며, 부산의 특산물이라도 되는 것처럼 홍보를 했다. 그런데 과연 영화에 등장하는 부산이 부산의 모습을 제대로 보여(알려)주는 것 인지 의문이다.
해운대는 휴가라는 면목으로 잠시 쉬었다 돌아가는 휴양지다. 집으로 돌아가는 관광객들은 그곳에 누군가 삶을, 일상을 살고 있다고 생각하지 못한다. 해운대에 사람들이 살고 있음을 모른 채 해운대를 소비하고 떠날 뿐이다. 그들은 최첨단 도시로 변모된 광안대교나 신도시의 화려함에 현혹되어 해운대를 소비했을 뿐이다. 그래서 영화 <해운대>에서 등장 인물들의 구체적인 삶은 발견할 수 없고 스펙터클 만이 남게 된다. 영화 속의 만식과 연희도 거주인의 모습이기보다 영화적 감동을 주기 위한 존재로 보이며, 피서객/거주인과의 차이를 살필 수 없어 보인다. 그래서 인물들은 쓰나미에 제대로 된 공격(대항) 한 번 해보지 못한 채 공포에 질려 휩쓸려 사라져가는 운명이다. 이때 그들은 영화에 필요한 도구가 된다. 사실 쓰나미가 몰려오는 곳이 ‘해운대(부산)’가 아니어도 상관없다. 높은 건물이 있고, 피서객들이 모이고, 거대한 쓰나미만 온다면 인천이나 포항이어도 무방했을 것이다. 영화 속에서 부산은 하등 중요하지 않다는 뜻이다. 과하게 말해 이 영화는 소문만 무성했던 쓰나미, 부산사투리, 사람들의 대피, 광안대교, 고층빌딩의 무너짐만 중요할 뿐이다. 도대체 이 영화를 부산영화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인가?
영화 <해운대>가 보여주고 있는 부산에는 사람들이살고 있는 장소임에도 그들에게서 일상의 모습을 발견할 수 없다. 이는 해운대에 다양한 삶이 존재한다 는 것을 망각하고 부산이라는 도시의 다양성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불거진 일이다. 그러므로 이제 더 이상 부산을 몇 가지 이미지들로만 기억해서는 안 될 것이다.
부산 혹은 부산영화의 위치
여기서 영화 <바람>(이성한, 2009)을 살펴볼 수 있다. 영화는 부산의 한 상업고등학교에 진학한 ‘짱구’의 학교 생활과 그의 가족 이야기로 진행된다. 짱구는 고등학교 3년의 시절을 통해 ‘인생’을 배운다. 폭력으로 상징되는 남자들의 세계를 배우고, 강한 놈만이 살아남는 남자들의 세계에서 어떤 행동을 해야 하는지, 좀 더 폼나게 살기 위해서는 어떤 행동을 해야 하는지 배운다. 시간이 흘러 짱구는 2학년이 되고 3학년이 된다. 시간이 흘러 인생을 아는 것이 아니라 지나온 시간을 통해 막내는, 소년은 점점 어른이 된다. 영화는 남성의 삶에 주목한다는 점에서 <친구>가 생각난다. 하지만 <바람>과 <친구>는 부산을 이야기하는 방법이나 남성을 다루는 점에서 전혀 다른 영화이다.
<바람>은 부산영상위원회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아 서면일대, 부산상고(현 개성고) 등 부산의 곳곳을 영상에 담았다. 부산 공간이 전면적으로 등장하니 부산영화라고 불릴 수 있어 보인다. 특히 영화는 부산을 고정적인 이미지로 만들지 않으면서 ‘부산의 위치’를 가늠하게 만드는 영화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바람> 속 소년들은 폼 나게 살고 싶고, 폼 나게 변화할 수 있다고 믿는다. (부산)영화 속 남성들이 그랬던 것처럼 세상을 폼 나게 살 수 있을 거라고 믿는다. 그러나 소년들은 아무것도 변화시킬 수 없으며, 어떤 일도 스스로 할 수 없으며, 자신의 무능력함만을 끊임없이 확인받게 된다. 그렇게 3년이 흘러 짱구는 고등학교를 졸업하는날 비로소 어른이 되는 건 ‘썰렁한 일(변할 수 없음)’임 을 알게 된다. 폭풍 같다고 생각했던 하루들이 고요한 ‘바람’과 같았을 뿐이다. <바람>은 부산에 사는 남학생들의 폭력성을 극대화한 영화가 아니다. 이 말은 이제까지 부산영화가 욕망하던 방식을 반복하지 않는다는 뜻이며, 부산영화 혹은 부산의 자리를 보게 한다.
부산영화 속 부산은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지 않은 채 중심이 요구하는 몇 가지의 이미지로 환원되어 왔다. 이미지는 실제로 존재하지만 중심의 욕망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여기서 짱구의 모습과 부산의 자리를 일치시킬 수 있어 보인다. 짱구는 남자들의 세계에서 중심에 서고 싶지만(이 자리는 3학년 중에서도 써클 가입자만 가능한 자리이다) 중심이 될 수 없다. 학교에서 군림할 수 있는 자는 3학년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시간이 흘러 짱구도 서클에 가입했고 3학년이 되어 폼을 잴 수 있지만 그것이 별 거 아님을 곧 알게 된다. 그 장(場)에는 아무것도 없었으며 또 변화할 수도 없는 심심한 곳일 뿐이었다. 그것이 바로 짱구가 원했던 세계의 ‘실체’였던 것이다. 부산도 부산영화도 마찬가지다. 영화 속 부산은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진 환영(이미지)일 뿐이다. 우리들은 그 이미지를 부산의 실체라고 믿는다. 부산에는 폭력이 난무하는 왠지 모를 애틋한 향수가 있을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하지만 우리는 ‘짱구처럼’ 알게 된다.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음을. 빈 자리임을 말이다.
한 편의 영화가 부산 공간을 확정지을 수 없다. 부산은 아니 지역은 쉽게 말해질 수 없는 다양성의 공간이기 때문이다. 혹은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은, 텅 비어있는 공간이다. 우리는 텅 비어있는 공간에 ‘이야기들’을 만들어 나가야 한다. 이때 부산영화는 지역민들의 삶을 구체적으로 탐색하려는 시도를 펼쳐야 한다. 구체적 삶의 조건을 상실한 지역에서 지역 성을 강조하는 영화가 등장하는 것은 중앙의 지배 논리와 동일하다. 우리는 이제, 지역의 왜곡된 구조를 바로 잡는 영화(부산영화)를 생산해내야 한다. 그래서 먼저 ‘부산영화’란 무엇인지에 대해 고민하고 의문을 달아야 하는 것이다.
1) 부산 광안리, 서면 일대에서 촬영한 영화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도‘ 회상’의 방식으로 진행되지 않는 영화다. 하지만 이 영화의 경우 부산에서 촬영은 했지만, 부산 공간이 전면적으로 드러나지 않았다는데서‘ 부산영화’라고 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든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논외로 두고 진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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