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경민의 객설- 봄신령을 지피자

황경민의 객설- 봄신령을 지피자

봄이 왔으면 봄을 살 일이지 꽃을 논할 일이 아니다. 여행을 갔으면 걸음을 살필 일이지 여행에 대해 논할 일이 아니다.

소란은 소란으로 씻고
며칠 전 느지막이 카페 문을 닫고 방으로 털레 털레 걸어가는데 전봇대 아래에서 누가 울고 서 있다. 새벽 두 시, 취기를 이기지 못한 청춘이 전봇대에 기대 제 연민의 소금기를 맛보고 있다. 등이라도 한 번 쓰다듬어 주고 싶었지만 아침이면 기억하지 못할지도 모를 시간—끊어진 필름에 괜한 표식을 남길 것 같아 차마 그럴 수는 없었다.

거기 서서 울지 말고
나들이라도 가렴
꽃이라도 만나고
푸른 바람이라도 맞으렴
퇴짜라도 맞아서
증오심이라도 가지렴
모든 게 살맛으로만 움트는 줄 아느냐?
살라꼬, 살아볼라꼬
죽지 않으니, 죽지 못해서
소란스러운 것 아니냐?
가라, 가서 네 소란을
소란 속에서 씻으렴
-헤세이티 게시글

을 배반한 아픈 몸
요즘 너무 일이 많다. 카페 헤세이티를 운영하면서부터 내 평생을 통틀어 가장 바쁘게 산 지난 1년 2개월이다. 머리는 멍하고, 속은 쓰리며, 등짝은 쑤시다. 그래서 이런 상상을 해본다. 헤세이티의 놀고먹는 고양이 헤세가 내 대신 입간 판을 쓰고, 나는 그냥 헤세처럼 노는 것이다. 헤세가 입간판에, 노천칠판에, 여기저기 보내고 올릴 잡다한 원고를 다 쓰고, 프로그램을 기획 하고, 홍보하고, 손님을 맞는 것이다. 대신 나는 하루 종일 자빠져 자고, 밥 묵고, 커피 묵고, 술 묵고, 담배 묵고, 어슬렁어슬렁 추리닝 바람으로 노는 일 말이다.

괴기 반찬이 안 나오면 밥투정도 하고, 돈통에서 만 원짜리 한 장 삥땅쳐서 만화방에도 가고, 가끔씩 술 취한 손님이 주는 팁도 챙겨서 영화도 보러 가는 것이다. 헤세가 개발새발 말도 안 되는 입간판을 쓰고 있으면, 괜히 옆에 앉아서 글씨가 삐뚜름하다느니, 엊그제 했던 얘기 또 우려먹냐느니, 듣기 좋은 꽃노래도 한 두 번이라느니 기도 채워가면서 말이다. 아, 그렇게 산다면 얼마나 좋을까 상상해 본 다. 그러나 나의 상상은 이내 망상이 되어 깨지고 만다. “헤세야, 저 자식 저거 은제까지 데불고 있을끼고?” “아, 저 자식 저거는 추리닝 밖에 없나? 옷 좀 갈아입히래이.” “야, 저리 안가나? 커피 묵는데 이 자식은 꼭 내 앞에서 눈꼽 떼더라.” “헤세야, 저래 성질 드럽게 생긴 놈을 카페에 두모 장사 안된다카이.” “저거는 뭘 얻어 처물라꼬 술자리마다 기웃거리노?” 이런 식으로 손님들의 원망 섞인 소리들이 들려오고 마는 것이다. 그래도 이때까지는 상상의 꼬리가 다 사라지지 않았다. “나쭈라. 저거 요서 안 거두모 누가 거두겠노? 생긴기 밉다꼬 인생까지 미워하모 되나? 그래도 저거 뚫린 주디로 말하는 짐승이다. 말하는 짐승인데도 저 꼬라진데 우야노? 마, 나쭈라.” 는 헤세의 목소리가 들려오면서 나의 상상은 완벽한 망상으로 변해버린다. 내가 이런 상상(망상)을 하게 된 까닭이 무엇일까? 왜 머리는 멍하고, 속은 쓰리며, 등짝이 쑤시는 걸까? 물론 현실적(재정)이고, 물리적(장소에 매이고 시간에 매인)인 상황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한계상황은 무엇이 불러왔는가? 개인적 의미에서 이것은 분명 욕심 때문이다. 잘 하려는 욕심, 오지 않은 미래를 미리 당겨 준비하려는 욕심, 지난 과오를 되풀이하지 않으려는 욕심 때문이다. 그 부하를 몸이 노출하고 있는 것이고, 그 방전된 상태를 정신이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왔는데 나는 을 모른 채 을 나고 있는 것이다. 을 살고 있는 척하니 몸이 아픈 것이다.

나를 잊고 을 살자
이 왔다꼬 꽃시 쓰고,
여행 갔다꼬 여행시 쓰고,
강정 갔다꼬 강정시 쓰고,
비 온다꼬 비시 쓰는 그런 거 딱 여럽다.
시란 가기 전에 쓰는 것이고,
오기 전에 쓰는 것이고,
투신하며 쓰는 것이고,
오지 않은 미래를 쓰는 것이다.
설사 갔다 온 후 쓰더라도,
왔다고 쓰더라도
석삼년 묵은 후에 쓰는 것이다.
석삼년 묵은 후에 쓰더라도 다만
오지 않은 과거-오래된 미래를 쓰는 것이다.
-헤세이티 게시글

이 왔으면 을 살 일이지 꽃을 논할 일이 아 니다. 여행을 갔으면 걸음을 살필 일이지 여행에 대해 논할 일이 아니다.

이다. 한창이다. 온 천지가 움이다, 싹이다, 풀이다, 꽃이다, 아지랑이다, 떨림이다, 만화방 창이다. 그러니까, 에 대한 감상(서정시) 따위는 접어두고, 당장은, 을 타자, 을 겪자, 을 살자. 미루지 말고, 당기지도 말고, 지금 당장, 여기를 살자. 신을 부르자, 접신을 하자, 신령을 지피자. 이 절정의 날, 한 번쯤은 ‘나’를 잊자, 잃어버리자.
bfc

 

황경민 부산의 인문학 카페 헤세이티의 대표이자 종업원이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고향을 등진 지 25년 만에 부산에 돌아온 탕자다. 카페를 시작하면서 입간판, 노천칠판 따위의 이상한 매체들을 개발하였고, <불법무단사설야매 시인학교>를 운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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