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ace Story- 복천동 고분에 누워

나른하고 느릿한 선형이 구불구불 하늘로 오르기도 땅으로내려앉기도한다. 공간이 그러하듯, 마음만 먹으면 시간 또한 경계를 늦추리라.

이윽고 춘삼월 도래하여 땅 기운이 하늘로 솟고 심사가 숫처녀의 첫 나들이처럼 난분분해지면 늘 그곳이 그리웠다. 아이처럼 퍼질러 앉아 스르르 땅이 되고프니 원초에로의 회귀던가? 그때마다, 겨우내찌든 마음을 얼마라도 내려놓을 수 있었다. 숨을 고르며 올라야 하니 언덕이다. 금정산을 오른쪽으로 왼편 장산과의 사이에 동래, 연산동, 서면까지 고루 품었으니 사람의 삶과 자연의 동태를 살피 기 좋던 곳이다. 설령 갑남을녀가 어울려 달맞이라도 하려던 동산이었으면 또 어떠리. 태고로부터였고 해마다 봄은 왔다. 그 어느 해 봄, 미지(未知)의 사 람들이 그곳에 시대의 넋을 묻었다는 사실은 아득하고 멀었다. 둥글고 완만한 언덕의 형상은 멀리서 보나 가까이 걸으나 마치 엄마의 몸과 같다. 여인의 몸매라 통칭하지 않아야 함은 그 위를 걸어보면 알게 된다. 훨씬 더 원초적이고 근본적인 것으로, 곡선의 느낌은 여인의 선처럼 관능적이라기 보다는 무어라 할 수 없는 아련함으로부터 오는 특유의 부드러움이기 때문이다. 초봄 아지랑이가 피어오를 날이면 더욱 그러하니, 나는 모든 태생(胎生)의 기운이 그렇지 않을까 생각한다. 어머니의 품에 안긴 나의 유년이 그랬을 거며, 잔디의 싹을 겨울로부터 깨어나게 한 해풍의 손길이 그러했을 거다. 그렇다면, 그런 아련한 감각들이 살아나는 이곳에 천칠백여년 유구가 묻혀 있었다는 사실 또한 이상할 게 없다. 무릇 살기 좋은 장소란 그런 아련함이 솔솔 생겨나는 곳이었다는 말이다.

박물관을 나와서 고분을 바라보면, 유려한 초록 곡선의 향연이 펼쳐진다.

박물관을 나와서 고분을 바라보면, 유려한 초록 곡선의 향연이 펼쳐진다.

긴 잠이었다. 짐작할 수 없었던 것들이 동면을 깨고 지표를 뚫어 현세의 우리 앞에 발현했던 것이니, 1969년의 일이다. 그리고 1994년까지 여덟 차례에 걸쳐 과거로 더듬어 올라가는 발굴 작업이 계속되었다. 만여 점의 유물을 출토하고 터를 복원하여 사적으로 지정하고 출토된 유물을 보관 전시해야 함은 현세 사람들의 기쁨이자 축복이었다. 유물이 보관된 박물관에 가면, 홀의 중앙에 철갑옷을 입고 마상(馬上)에 앉은 가야(伽倻) 장군의 위엄이 떡 버티고 서 있다. 주제가 철기 문화이며 그 주역이 가야 사람이었음을 웅변한다. 그들의 유구가 지금 이 고을의 자랑이 되고 있으며, 무덤을 파낸 후세의 불경조차 용서되고 승화되려는 것이다. 옛사람과 후손들이 합작하였으니 진정 애향(愛鄕)이 아닌가?

박물관을 나와서 고분을 바라보면, 유려한 초록 곡선의 향연이 펼쳐진다. 온 세상이 잔디밭이다. 선의 끝은 하늘에 맞닿아 있어, 마치 시간을 잊고 블랙홀 속으로 들어오라는 손짓 마냥 몽환적이다. 나른하고 느릿한 선형이 구불구불 하늘로 오르기도 땅으로 내려앉기도 한다. 공간이 그러하듯, 마음만 먹으면 시간 또한 경계를 늦추리라. 현세의 사람들은 유구의 잔해를 파낸 자리에 누운 관목의 띠로 죄스러움을 상징해 놓았다. 마치 한글 모음 ‘ㅁ’ 자와 같은 형상을 한 이 상징은 지금의 번잡한 도시가 여기로부터 시작되었다는 선언으로 읽힌다. 우리는 그 상징을 통하여 잠시 현세를 잊고 먼 태고로 돌아갈 수 있다.

좋은 여행은 예측되지 않으며 실로 무심결에 이루어지는 것이다. 과거로의 시간 여행 또한 마찬가지. 야외 전시관 유리문을 열고 들어가면, 지표의 3~4m 아래에 위치한 돌무덤 아래에 그릇과 잔과 항아리 무리가 현세 사람들을 맞는다. 그 순간 유물과 터는 나와 일각의 차이도 없이 같은 태양 아래에 서게 되며, 과거와 현재는 같은 자격으로 그곳에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흙을 빚었던 이도 탐색하는 나도 인간이라 명명되었기 때문이다. 시간이 차츰 지나면서 관람자는 너나 할 것 없이 태초의 순수로 돌아간다. 원래 우리가 가졌던 그 마음이다. 언제 어디에서 잃어버렸을까? 찾을 수 있기나 한 것일까? 말이 없는 유물들이 그런 생각을 하게 한다. 우리가 가끔 시간을 내어 옛것을 더듬어야 하는 이유이다. 그 시간의 징표가 지금 내 눈앞에 있다.

야외 전시관 유리문을 열고 들어가면, 돌무덤 아래에 그릇과 잔과 항아리 무리가 현세 사람들을 맞는다.

야외 전시관 유리문을 열고 들어가면, 돌무덤 아래에 그릇과 잔과 항아리 무리가 현세 사람들을 맞는다.

다시 밖으로 나와 트인 앞을 바라본다. 이곳이 삼국시대로부터 조선에 이르기까지 역사의 중요한 한 지점이었음을 알아차리기에 어렵지 않다. 고분이 동래성(東來城)의 권역에 자리하고 있는 이유는 굳이 후세에 확립된 풍수 지리를 빌어 양택(陽宅) 음택(陰宅) 논하지 않아도 된다. 앞서 내가 느낀 터 의 느낌 그대로가 아닐까? 역사로 기록되기 훨씬 이전부터 좋은 자리였으며 지금까지도 묘지로 대접받고 있으니 양(陽) 음(陰) 불문하고 유구한 터였다. 이 장소를 만들어 내고 보존해 온 것이 동래 사람들의 열정이라면, 그것 역시 고대인들의 기질로부터 온 것이리라. 여전히 동래 사람들이 특유의 보수적기질을 가졌음과 향토 자부(自負)에 유별나다면, 그것 또한 이 토양 위에 살면서 오래도록 몸에 밴 거부할 수 없는 고유의 형질이다. 부산 사람들에게 이곳의 의미는 모태의 자궁과 같은 것이다. 나는 그러한 ‘동래’가 다른 곳보다 느린 걸음을 걸었으면 한다. 이곳이 고층 아파트와 자동차 들로 둘러싸인 모습을 상상하기 싫은 까닭이다. 예로부터 동래 사람들의 애 향심은 남달랐으므로 걱정할 것은 없겠으나, 부디 ‘복천동 고분’주변이 올바른 의식과 참된 의지로 충만한 곳이었으면 하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고대인들의 유구를 살펴본 후, 나의 애향심이 더더욱 공고해진 것이리라.
bf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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