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군정기 지역영화사의 탐색

미 군정기 지역영화사의 탐색

역사는 과거와 현재와의 끊임없는 대화일 뿐만 아니라 대면하기와 끌어안기의 과제를 우리에게 던져준다는 점이다.

뉴스 및 영화는 당대의 시대상을 반영한다. 그러나 이러한 대중매체들에 비친 당대의 사회상에 대한 해석은 다양한 접근과 분석을 요한다. 왜냐하면 매스미디어는 특정 시기나 국면에서는 국가권력의 일방적인 이데올로기적 통치기구로 작동하기도 하고, 또 다른 상황에서는 사회 구성원들 간의 다양한 의견과 쟁점들이 격돌하는‘ 문화정치의 장’이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1950년대는 미-소 냉전이 격화되는 시기였다. 이러한 냉전은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나는데, 특히 매스미디어 등을 중심으로 해서 드러나는 양상을 ‘문화적 냉전(Cultural Cold War)’이라고 말한다. 문화적 냉전의 요체는 미-소 양대 국가 간의 치열한 냉전을 문화적으로 포장하여 당 사국들의 이해관계를 선전하는데 있다. 즉 냉전은 원래 사람들의 ‘마음과 생각’을 얻기 위한 싸움이었으며, 미국의 정책결정자들은 냉전이 여론의 장에서 승부를 가를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정책 내용에는 대소련 및 대공산권에 대한 선전뿐만 아니라 우방국들의 문화예술진흥과 지식인에 대한 교육지원정책 등이 포함되어 있었으며, 1950년대 한국에서의 미공 보원의 역할과 기능 역시 이에 치중되어 있었다. 한국의 경우 냉전이 가장 치열했던 1950~60년대 동안 위와 같은 미공보원의 주된 선전 활동들 (특히 뉴스 및 문화영화를 통한)이 경남의 창원지역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는 사실은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다. 물론 지역영화사 발굴 및 소개에 매진하고 있는 극소수의 연구자나 이 당시 경남지역의 미공보원 영화제 작소(Production and Laboratory Services Unit, 상남영화제작소라 부른다)에서 활동했던 일부 인사들의 글이나 증언들을 통해 소략하게나마 알려진 바가 없지는 않다. 그러나 이들의 글이나 증언들이 지나치게 단편적이어서 더욱 궁금증을 유발하기도 하고, 나아가 일부 역사적 사실에 대한 사소한(?) 잘못 등이 발견되기도 한다. 그리고 이 당시 진해 및 특히 창원에서 활동을 하였던 미공보원 상남영화제작소의 활동과 그 내용이 비록 미국적 관점이 투영된 것이기는 하지만 당시 한국의 시대 상황을 비교적 충실하게 담아내고 있고, 이후 한국의 영화제작환경 등에 끼친 영향이 지대하기 때문이다. 미공보원이 경남지역으로 이전해 온 시기와 당시의 상황에 대해 잠깐 살펴보도록 한다. 여러 선행연구들과 증언 등에 따르면 이는 한국전쟁이 발발한 직후인 것으로 확인된다. 즉 한국전쟁의 발발로 인해 미공보원 산하 영화제작소는 진해로 거점을 옮긴 후, 영화제작에 필요한 시설을 마련하게 된다. 한국전쟁의 직접적인 전화를 피하기 위해 진해로 오게 되는 과정에 대한 윌리엄 릿지웨이(상남영화제작소 초대 소장) 의 구술이 흥미로운데 이를 잠깐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중공군의 도움을 받은 북한의 재침공으로 진해로 피난하게 되는 직원들과 그 식솔들은 모두 350여 명에 이르렀고, 이들을 진해로 이송하기 위해 릿지웨이는 미육군 상사에게 위스키 7병을 주고 7량의 화물차를 제공받는다. 이를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제작인력은 열차를, 기자재는 배편을 이용해 진해로 이전 되었다. 이 당시 가져온 장비 중에서 특기할 만한 사항은 막대한 양의 16 밀리미터 필름이었다고 한다. 이와 함께 쓰던 35밀리미터 필름은 북한군이 모두 몰수해 갔다고 한다. 왜냐하면 당시 북한군이 영화제작에 주로 쓰던 필름은 35밀리미터였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미공보원과 함께 진해로 내려온 한국인 영화인력도 많았다.

부산을 거쳐 진해에 도착한 릿지웨이 일행은 소규모의 정보센터를 스튜디오로 활용하게 된다. 릿지웨이는 이 정보센터가 전 ‘일본해군장교클럽’이었다고 회상한다. 이 건물은 전형적인 일본식 형태였고, 문들의 경우 창호지를 바른 미닫이문이 대부분이어서 화재에 무방비 상태였다고 한다(영화제작에 있어 매우 위험한 환경). 그는 이러한 시설을 개선하기 위해 당시 부산으로 와 있던 미육군본부 공보부에 지원요청을 하게 된다. 이 결과 약 7~8천불의 자금지원을 받아 6~7주에 걸쳐 건물의 수리를 마치게 되었다고 한다. 릿지웨이에 따르면 이 당시 한국인 직원들은 모두 85명이었으나, 영화 관련 기술은 전혀 갖추지 못한 상태였다고 한다. 이 이유는 다음과 같이 추정된다. 즉 한국전쟁 전까지는 영화제작편수가 극히 적었고, 대부분의 필름은 미국으로부터 가져온 것들이었다. 이러한 까닭 에 한국인 근무자들의 숙련형성 기간이 짧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들은 향후 한국영화산업의 주역이 된다.

이와 같은 진해 시설의 인적·물적 재정비를 통해 매주 뉴스릴(News Reel 당대에 일어나는 주요 사건들을 필름에 담는 기록 영화)을 제작할 수 있었고, 이때부터 미국 필름의 한국 적용이 시작된다. 릿지웨이는 진해 소재 미공군기지에서 16밀리미터 필름과 필름자동처리기를 빌려와 필름의 인쇄를 더욱 빠르게 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진해에서 제작된 것은 <한국 늬우스>라는 제호의 부정기적인 뉴스영화뿐이었다. 즉 미공보원의 뉴스 및 문화영화제작은 당시의 ‘창원군 상남면’에서 본격화된다. 미 공보원의 영화제작시설이 창원의 상남면으로 이전하게 된 때는 1952년 초였다. 이에 대한 릿지웨이의 기억은 다소 모호하다. 왜냐하면 그는 이전 시기를 1951년 말이나 1952년 초로 구술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아일보 기자였던 호현찬이 1962년 3월 26일에 썼던 기사의 제목이 「< 자유의 종」 울려 10년 上南『 라보』>이고, 이 기사에 “「上南프로덕션」은 올해로 만 10년을 맞았다.”는 내용이 있는 것으로 보아 진해에서 창원으로의 이전 시기는 1952년이 정확하다고 할 것이다. 이는 여러 연구자들의 언급에서도 확인된다.

한편 대부분의 연구들에서는 미공보원의 영화제작시설이 진해에서 창원으로 이전하게 된 계기를 공산주의자들의 시설에 대한 위협에서 찾는다. 즉 부산과 인접한 진해는 북한군의 접근 가능지역이었으므로 보다 안전한 지역으로의 이전이 불가피하였다는 것이다. 이는 릿지웨이의 구술 증언과도 일치한다. 릿지웨이는 창원군의 상남면에서 영화제작시설의 이전에 적합한 환상적인 빈 건물을 발견하였다고 말한다. 이 건물은 “유사 2층 건물로 영사실이 반층 정도 올라가 있는 구조로 이루어져 있었고, 해군이 파놓은 굴이 있어서 그 안에 필름을 보관하기 용이했다.” 그는 미육군 공보부로부터 2만 5천불을 지원받아 이 건물에 완벽한 방음이 되는 사운드스테이지를 구축하고, 화재예방장치를 갖추는 등 새로운 시설로 탈바꿈시킨다. 그리고 1953년 한국 해군으로부터 10년간 무상으로 이 건물을 임대 받게 된다. 이후 이 임대는 1967년까지 연장된다.

한편 그는 미국으로부터 최신 자동현상기와 프린트장비 등을 들여와 명실상부한 영화제작소가 되도록 그 기초를 마련한다. 이러한 까닭에 당시의 창원군 상남면은 ‘ 한영화의 메카’ 또는‘ 작은 할리우드’, 그리고 한국영화제작인력들을 위한 ‘모션픽쳐 아카데미’ 등으로 불리었다. 기본 시설로는 원고실, 번역실, 미술실, 음악실, 녹음실, 편집실, 현상실, 자동인화실, 전기실, 그리고 건조실 등이 있었고, 뉴스는 일주일에 1권(러닝타임 10분 정도)씩 정기적으로 제작하였고, 문화영화는 1개월에 1권씩 제작되었다. 1950년대 이후 미공보원 상남영화 제작소에서 만든 한국 주제 관련 문화영화들은 매우 방대한 양에 이른다. 그런데 이 중에서 경남(마산)과 관련된 영화는 거의 없다. 단지 두 편만 존재한다. 즉 1955년의 <거리의 등대>와 1958년의 <지방신문 편집자>가 그것이다. 이를 간단히 소개한다. <거리의 등대>는 1955년 12월 14일 마산 극장에서 대한소년문화원 주최, 마산시, 마산경찰서, 마산문화협의회, 그리고 미공보원 후원으로 시사회를 가지기도 하였다. 참고로 대한소년 문화원은 마산 소재 ‘36육군병원’의 정훈장교였던 박덕종 중위에 의해 시작되었다. 그 역시 고아로 자라난 인물이다. 그는 전쟁고아나 거지, 그리고 전쟁으로 인해 결손가정이 된 아이들을 모아 ‘독립, 자기신뢰, 정직’이 라는 목표아래 이들을 교육시켰다.

그리고 1958년에 제작된 <지방신문 편집자>는 신문제작의 시간적 순서에 따라 약 7개의 시퀀스(Sequences)로 구성되어 있다(러닝타임은 약 21 분 정도). 영화는 주인공인‘ 마산일보사’의 편집국장이 신문사로 출근하는 장면에서 시작된다. 그리고 이 영화에는 당시 마산일보사 사장이었던 목발(目拔) 김형윤 선생이 등장하기도 한 다. 2층 건물인 ‘마산일보사’에는 ‘동양 통신마산지사’와 ‘합동통신마산지사’가 함께 있다. 마침 이 날은 <마산일보>가 지령 3,500호를 돌파한 날이다. 내레이터가 신문의 일반적인 기능과 함께 당시 이 신문이 지역의 유일한 지방지였다는 설명을 덧붙인다. 내레이터의 목소리로 대변되는 편집국장은 기자들에게 그동안의 노고를 치하한다. 그리고 기업으로서의 신문은 독자들의 신용과 지지에 기 반을 두는 것임을 강조하고, 최근 지국으로부터 월간 구독부수가 20부 증가했다는 소식이나 광고수입이 증가했다는 것은 독자들의 지지가 늘어났음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뒤이어 기자들이 취재를 나서는 장면과 민원인(고아원 원장)이 직접 신문사를 찾아와 어려운 사정을 호소하는 장면이 나온다.

(1958)에 나오는 마산일보사와 편집국장

<지방신문 편집자>(1958)에 나오는
마산일보사와 편집국장

지면 관계상 자세한 소개는 하지 못하지만 미군정기하의 지역영화사가 지니는 의미는 다음과 같이 정리될 수 있다. 첫째, 이 글에서 소개한 1950 년대 미공보원의 영화제작활동이 한국영화사에서는 거의 소개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몇 사람의 저서에서 약간의 언급이 있을 뿐이고, 또한 이 시기 활동하였던 한국 영화인들의 구술사에서 소략한 정도로만 언급되고 있을 뿐이다. 이는 일제강점기하의 한국영화사에 대한 그간의 연구 성과와 비교해보더라도 매우 일천한 것이다. 향후 미군정기 동안의 미공보원의 영화제작활동에 대한 보다 풍부한 연구가 이어짐으로써 한국영화사의 보다 완결적인 체계가 갖추어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둘째, 영화를 통한 기억의 재현은 단순한 회고로만 그치는 것이 아니고 이 러한 재현이 지니는 사회문화적 의미를 보다 풍성하게 할 수 있다는 점이다. 즉 1950년대의 역사적 사실에 대한 대중의 관심을 환기시키고 과거사 문제를 대중적 논의로 확대시키는데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점이다. 특히 여기서 소개된 두 편의 영화는, 역사는 과거와 현재와의 끊임없는 대화일 뿐만 아니라 대면하기와 끌어안기의 과제를 우리에게 던져준다는 점이다. 이러한 점에서 1950년대 경남 마산을 배경으로 제작된 미공보원의 영화를 특정한 이데올로기의 입장에서만 조망할 것이 아니라 현재의 시점에서 이를 어떻게 문화적 자원과 자양분으로 전화할 수 있을 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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