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와 ‘추’란 대립적 개념이 환희와 비탄, 삶과 죽음의 역설적 공존만큼이나 미묘한 연관성을 지니고 있음을 제시한다.
마테오 가로네 감독의 <테일 오브 테일즈>는 바로크 시대의 이탈리아 시인 잠바티스타 바실레에 의해 집대성된 당대의 민담을 소재로 삼은 판타지 영화다. <펜타메로네>라는 제목으로 알려진 원작은 작가의 사후, 가수로 활동하였던 그의 여동생에 의해 ‘이야기 중의 이야기, 어린이를 위한 여흥’이라는 제목의 소책자로 발간되어 세간에 공개되었다. <테일 오브 테일즈>는 원작에 실린 오십 편의 이야기들 가운데 세 편의 독립적인 이야기를 가져와 옴니버스 식으로 구성한 작품이다. 제각각의 인물들이 등장하여 서로 다른 사건들을 꾸려나가는 세 편의 이야기들은 비록 직접적인 연관은 없으나 마치 한 편의 이야기인 듯 유기적인 흐름으로 맞물려 있는데, 훗날 그림형제와 J.R.R.톨킨을 비롯한 수많은 작가들에게 영향을 미친 바실레의 기괴하면서도 매혹적인 세계관은 영화에서 그려진 짧지만 강렬한 세 편의 이야기들 가운데 고스란히 녹아들어 있다.
<테일 오브 테일즈> 속 세 편의 이야기들에서 우리가 마주하게 되는 것은 제각각의 욕망에 사로잡힌 권력자들의 모습이다. 그들은 자신이 지닌 힘과 권력으로 마음속에 도사린 욕구들을 능히 충족할 만한 위치에 놓인 인물들이다. 사실 영화 속 권력자들이 추구하는 욕망의 대상들은 별반 특별할 것 없이 보편의 범주를 넘어서지 않는 평범한 개념들에 불과하다. 그들은 자식을 원하는 불행한 왕비이거나, 끊임없이 여체의 미를 갈구하는 방탕한 왕인가 하면, 기묘한 취미생활에 탐닉하여 딸을 파멸로 몰아넣는 무능한 지도자의 모습으로 등장한다. 여기서 이들의 이야기가 흥미롭게 느껴지는 것은 비단 권력자들만의 유별난 취향에 국한되어 있다고 여길 순 없는 욕망 그 자체에 있다기보다는, 하찮은 욕망들에 이끌림으로써 광기와 집착의 감정에 함몰되어버린 인물들이 자신들에게 이미 예견된 바 있는 파국의 국면 한가운데로 기꺼이 걸어 들어가는 모습 가운데서 인간의 우매함에 관한 풍자와 냉소가 엿보이기 때문일 것이다.
오랫동안 아이를 가지지 못한 왕과 왕비 앞에 수수께끼의 예언자가 나타난다. 그는 부부를 둘러싼 불화와 갈등의 원인이 왕비의 오랜 불임이라는 사실을 알아채곤, 그들에게 넌지시 귀띔한다. “탄생은 항상 죽음으로 얼룩집니다. 죽음은 결국, 탄생의 한 부분입니다.” 임신을 위해선 처녀가 요리한 바다괴물의 심장을 먹어야만 한다는 예언자의 조언. 왕은 이 정체불명의 사내를 의심스러워하지만, 아이를 간절히 원하는 왕비의 바람을 이루어주고자 호기롭게 바다 한가운데에 뛰어들어 몸소 괴물을 사냥하다 세상을 떠나고 만다. 왕비는 남편의 죽음을 애도할 겨를도 없이, 바다괴물의 심장을 게걸스레 먹어치우곤 이내 아이를 임신하게 된다. 아이를 가지고 싶다는 왕비의 욕망은 그 아이가 어떤 존재로부터 비롯하였고 누구의 희생을 치른 결과인지조차 망각하게끔 그녀를 이끈다. 새로운 탄생이 죽음으로 얼룩진다는 예언자의 전언에서 죽음이란 비단 괴물의 존재뿐만 아니라 왕비를 사랑하였던 왕의 희생 또한 필연적으로 뒤따른다는 사실을 그녀는 알고 있었을까.
탄생이 곧 죽음에 해당한다는, 혹은 누군가의 죽음이 탄생으로 기인한다는 첫 번째 이야기의 역설은 ‘아름다움’과 ‘추함’에 대한 두 번째 우화로 치환된다. 어느 날 갑자기 젊고 아름다운 미녀로 변신한 이야기 속 노파는 그녀를 발견한 왕에게 간택되어 일약 왕비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 왕비의 비밀을 아는 존재는 그녀의 여동생으로, 그녀는 갑자기 젊고 아름다워진 자신의 언니를 바라보며 부러움과 시기의 감정에 젖어들게 된다. 숲속에서 깨고 보니 육신을 둘러싼 허물이 벗겨지며 늙은 제 모습이 변했다는 언니의 말을 듣고, 동생은 자신의 늙고 추한 육신에서 벗어나고자 면도칼로 제 피부를 난도질한다. 젊고 아름다워지기는커녕 피투성이 괴물의 모습으로 길거리를 배회하는 여동생의 모습은 덧없는 욕망의 끔찍한 귀결을 환기시킨다.
두 번째 이야기 속 방탕한 왕과 두 자매가 아름다움이라는 관념에 경도된 인물들이라면, 세 번째 이야기에 등장하는 무능한 왕은 그 반대의 경우로 비쳐진다. 왕은 자신이 키우는 거대한 벼룩을 애지중지하며, 그 흉측한 외양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몸집보다 더 비대한 곤충에 열과 성을 바친다. 어느 날 그 벼룩이 허무하게 죽어버리자 상심에 잠긴 왕은 벼룩의 가죽을 벗겨, 가죽의 정체를 알아맞히는 사람에게 자신의 딸을 신부로 내주겠노라 공언한다. 잘생기고 멋진 신랑감을 원했던 공주의 바람과는 달리, 가죽의 정체를 알아맞힌 사람은 포악하고 못생긴 야만인이었고 왕은 자신의 공언을 차마 저버릴 수 없어 공주를 그에게 시집보내고야 만다.
벼룩을 사랑했던 비루한 왕은 ‘아름다움’에 매혹되었던 두 번째 이야기의 인물들과 달리, ‘추함’에 대해 강렬한 매혹을 드러낸다. 새로운 ‘탄생’에 집착하였던 왕비의 욕망이 왕의 ‘죽음’을 초래하였듯이, 미(美)와 추(醜)라는 양극단에 욕망의 극치를 드러내었던 인물들은 그리 아름답지도, 추하지도 않은 세상의 엄혹함 가운데서 엉터리 희비극을 연기하는 저자거리 광대의 신세와 다름없이 전락하고 만다. 영화 속 예언자의 말처럼, ‘욕망에는 그에 상응하는 대가가 따른다.’ 수백 년 전 시인이었던 잠바티스타 바실레의 시선으로 굴절된 세상은 아름다움에 대한 탐닉과 죽음에의 공포가 공존하는 세상이었고, 이는 <테일 오브 테일즈>의 기괴하며 그로테스크한 분위기와 무관하지 않다.
얼마 전 타계한 움베르토 에코는 자신의 저서 <추의 역사>에서, ‘추를 조화나 비례, 완전무결함으로 이해되는 미의 반대’라 규정하는 세간의 분류법에 의문을 제기하였다. 그에 따르면, 지나친 아름다움은 자칫 추함으로 비쳐질 수 있으며, 이와 반대로 극단적 ‘추’ 또한 ‘이상적인 아름다움’으로 귀결될 수 있다는 것이다. 흉측한 벼룩을 마치 아름다운 여인인 듯 사랑하였던 왕, 그리고 젊고 아름다워진 언니를 부러워하여 제 피부를 벗겨내 스스로 괴물이 되고 만 노파의 이야기는 ‘미’와 ‘추’란 대립적 개념이 환희와 비탄, 삶과 죽음의 역설적 공존만큼이나 미묘한 연관성을 지니고 있음을 제시한다.
![문성훈의 리와인드 [이야기 중의 이야기 <테일 오브 테일즈>]](https://fb.snsmodoo.com/wp-content/uploads/2016/12/movie_image-4-690x450.jpg)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