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거운 감자를 목구멍으로 밀어 넣기 어렵듯 애도를 위한 제의(祭儀)는, 지금, 아직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이 영화는 그만큼 직핍하게 보여준 것인지도 모른다.

<지슬>(2013)
1. 신전(神殿)에 들다.
제주에는 예부터 많은 신(神)이 존재했다. 학계에 따르면, 대략 18,000여 신이 500여개 의 신화 속에 등장한다고 하니, 제주는 섬이 아니라 그 자체로 거대한 신들의 땅, 신전이라 할 만하다. 특이한 것은 그 중 많은 신 (대략 70%정도라 한다.)이 여성신이라는 점 이다. 가믄장, 자청비(自請妃)와 같은 영웅적 여신 뿐 아니라, 태어날 때부터 뱀이었던 사신(蛇身)도 있고(<칠성본풀이>), 육지에서는 찾기 어려운, 세계를 창조한 신(설문대 할망) 도 있다. 이렇게 보면, 제주는 가히 여신의 땅이요, 여신의 신전이라 할 만하다. 그런데 이 많은 여신들이 그저 착하고 지혜로우며 인내심이 많기 때문에 신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뒷날 전상(운명)의 여신이 되는 가믄장은 ‘누구 덕에 먹고 사느냐’는 부모의 물음에 ‘부모님 덕’이 라고 말한 언니들과 달리, ‘내 배꼽 아래 선그믓 덕으로 산다’고 당돌하게 말한다. 딸만 낳아 근심이 가 득한 집안에 막내딸로 태어난 한 아이는 ‘자청하여 태어났으므로’ 자청비 (自請妃)가 된다. 백주또는 또 어떠한가? 그녀는 무능력할 뿐 아니라 남의 소까지 잡아먹은 남편에게 ‘살림 분산하자’며 먼저 이혼을 요구한다. 제주의 여성들은 속옷 하나 해 입을 수 없을 만큼 가난하고, 매일 빨래와 씨름해야 하며, 치마폭에 흙을 담아 나르는 노동을 감수해야 했다.(<설문대 할망 설화>) 또 한 밭농사와 물질까지 겸해야 했다. 이처럼 고단한 하루하루를 살아왔음에도 그들은 자신의 운명을 무기력한 체념과 한(恨)이 되도록 내버려두지 않고, 이승 너머의 서천꽃밭을 4월의 유채꽃밭으로 불러오는 싱그러운 생명력으로 끈질기게 살아남았다. 그것이 제주가 품고 있는 신성성의 참모습이라 해도 크게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이런 점에서 제주는 신전이되, 운명을 제 스스로 개척해 나아가려는 모든 사람들이 거해 온 신전이라 할 수 있다.
2. 신위(神位)를 세우다.
하지만 뭍의 인간들은 신들의 땅, 제주에 총 칼을 가지고 들어와 신들을 마구 학살했다. “ 해안선 5km 밖 모든 사람들을 폭도로 간주한다”며 미군의 비호를 받은 신생한국정부군이 한국민을 학살할 때, 신들도 함께 학살 당한 것이다. 제주에 흩어져 있는 수많은 신화들은 토착민과 외래민의 결합을 통해 새로운 세대에 의한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 왔음을 증언해왔다. 삼성혈에서 솟아난 고, 양, 부 세 신인이 바다를 건너 온 세 처녀를 아내로 맞이하여 각자의 거처를 정한 이야기나 바람운을 좇아 고산국과 지산국 자매가 제주에 들어와서 좌정했다는 <서귀본향당 본풀이>는 그 예이다. 그러나 48년의 외래군(軍)은 새로운 세대, 새로운 질서의 가능성 뿐 아니라 현재의 모든 것마저 앗아버리고 말았다. 그런데 올해 3월, 이미 환갑도 더 지난 이 불편한 기억을 오멸 감독과 고(故) 김경률 감독은 지붕 위에 올라 고복(皐復)하듯 재현해냈다. 그런 점에서 <지슬>은 영화가 아니라 한 판의 씻김굿 같고, 아직 신(神)이 되지 못한 자들을 신으로 좌정하게 하기 위한 본풀이 같다. 이 영화가 제사의 형식을 띤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김 상사에게 유린당 해 죽음을 맞이한 순덕의 몸을 평화롭고 아 름다운 오름의 이미지에 오버랩 되게 할 때, 이 영화는 제의적 성격을 가진 것으로만 보 기 어렵게 된다. 영화 도입부에서, 카메라가 흩어져버린 제기(祭器)들을 비추다가, 죽은 여인의 시신 앞에서 배를 깎아 먹는 김 상사에게 향할 때에도 마찬가지이다. 제사는 신에게 드리는 제사이고, 당연히 신의 존재가 전제된다. 그러나 순덕의 죽음이 어머니 대지의 죽음이 되고 제기마저 군홧발에 짓밟히는 상황이 될 때, 이 영화는 신마저 죽어 그 제사마저 불가능해진, 인간과 신 모두의 죽음을 외설적일만큼 선명하게 선언하는 영화가 된다.
3. 신묘(神廟)에 모시다.
당연한 말이지만, 죽음은 삶을 전제로 한다. 삶이 가치가 없다면 죽음도 가치가 없는 것 이다. 그런데 죽음의 가치는 죽음 그 자체의 완전한 종말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삶을 잉태하는 전제조건이 된다는 데 에서 찾을 수 있다. 적어도 제주 신화 속에서 죽음은 더 나은 삶의 가치를 창출하기 위한 전제이다. 그러니 죽음과 삶 사이의 경계가 그리 단단하지만은 않다. 서천꽃밭에 지천 으로 피어 있는 꽃들은 절실하고 진실한 인 간의 불행한 죽음을 위해, 그 숨결을 되살리 기 위해 존재한다. 죽음은 슬프고 고달픈 일 이되, 언제든 생명의 가능성을 예감한다. 오 곡(五穀)은 땅에 뿌려져 죽은 듯 가만히 있지 만, 언젠가 풍성한 열매로 맺혀져 저 허다한 입들을 먹여 살린다. 그러니 생활에서든 신 화에서든 죽음은 언제나 삶과 함께 하는 또 다른 삶의 한 양태로 주어진 것이다. 그러나 48년 이후, 죽음은 더 이상 삶과 함 께 하지 못한다. 서천꽃밭을 향한 모든 길은 끊어졌고, 곡식은 모두 타서 재가 되었다. 어 미가 제 몸을 태워 마련한 지슬(감자)을 마을사람들은 영문도 모른 채 먹지만, 어미의 죽 음을 말하지 못한 순동은 울음을 삼키며 끝 내 먹지 못한다. 이제까지 먹은 “참말로 돈 (단) 지슬”은 신들에게‘ 씨드림’의 대가로 얻 은 것이었다. 그러나 순동은 어머니 대지가 낳아준 그 풍성한 결실이 끝났음을 그 때 이 미 예감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앞으로는 오직 생명 없는 죽음만이 차디찬 흰 눈과 칼 바람으로 대지에 횡행할 뿐이라고 여겼는지 모른다. 모셔야 할 신이 없고, 모실 수 있는 인간이 없는 세상이 도래할 것이라고 몸을 부르르 떨었을는지도 모른다. 모든 생명을 낳은 구멍, 큰넓궤(큰 동굴)만이 살아남은 자 들을 위한 유일한 안식처이지만 아이를 안 은 어미라도 용서하지 않았던 잔인한 총부 리처럼, 방비가 허술한 이 동굴에도 군인들 이 총을 겨눌 것이라는 예감을 그는 이미 하 고 있었을 것이다. 마을 사람들은 그렇게, 단 지 제주민이라는 이유로, 이유가 될 수 없는 이유로, 예감을 현실로 이끈 당사자가 되고 말았다.
4. 음복(飮福)하다.
48년 이후로 이 땅에 신은 없다. 신들을 모실 인간도 없다. 신은 그 출생이 비록 미천하더라도, 그 나중은 심히 창대하기에 신이다. 신의 신성성은 인간이 갖지 못한 독점적 권위를 인간이 희구할 때 비로소 찬란하게 빛난다. 그러나 신이 사라진 자리에 남은 인간은 겨우 스러져가는 의식을 붙잡으며 젖은 땅바닥을 기어가는 김 상사처럼 꺼져가는 욕정의 덩어리가 될 뿐이다. ‘어머니를 죽인 빨갱이’들을 증오하며 어머니 같은 순동의 어미를 찌르는 군인도 마찬가지이다. 그 는 스스로 신이 버린 패륜아가 되고 만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는 제주도민 뿐 아니라 명령을 받아 학살을 자행한 군인 또한 삶의 가치가 여지없이 파멸되었음을 보여준다. 제주는, 신전의 땅은, 그렇게 역설적으로 가장 신이 없는 불모의 땅이 되고 만 것이다. 신의 신성한 힘을 인간은 더 이상 음복으로 나누어 가질 수 없다. 그렇기에 영화는 희붐한 연기와 어두운 동굴에 가려진 인물 군상들을 희미한 윤곽선으로 자주 잡아낸다. 겨울바람에 잎이 모두 떨어진 나무는 검고 앙상한 실루엣으로만 관객들에게 제시된다. 제주의 아름다운 풍경은, 신이 사라지기 전 인간에게 남긴 마지막 유물은, 그렇게 시야를 가리는 연기와 펄펄 끓는 김, 매서운 눈바람에 가 려, 신도 인간도 모두 죽어버려, 더 이상 신성할 수 없는 메마른 사물들로 희미한 윤곽선만 남은 채로 내던져진다. 그러니 이 영화는 불편하다. 신성이 사라져버리는 과정을, 그 고통과 불안을, 영화는 안락한 의자에 앉은 관객에게 계속 직시하도록 강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5. 소지(燒紙)하다.
그렇다면 이 영화는 역사의 아픈 상처를 치유하는 영화라 말할 수 없다. 당사자들을 위로한다고도, 위무한다고도 말할 수 없다. 이 영화는 결코 제거할 수 없는 불안에 관한 영화이다. 끔찍한 학살도 끝이 났고 영화도 끝이 났다. 하지만 이 영화는 근대사의 아픈 진실을 들춤으로써, 저들 제주도민의 불안이 변방에서 일어난 과거의 한 사건으로만 끝나고 있지 않음을 확인하게 해 준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는 불안의 계보학적 탐색을 시도한 영화이다. 불안은 근대 국민국가의 성립에서부터 이미 지속되어 왔으며, 그것이 근대 체제의 예외가 아닌, 본질임을 이 영화는 생생하게 알려주고 있다. <도가니>(2011) 처럼 잔인하거나 <박하사탕>(1999)처럼 주장하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죽음을 강제적으로 목격하게 하는 영화들보다 훨씬 심각하게 관객이 앉은 자리를 옥죈다. 삶의 맥락에는 해학도 있고, 사랑도 있으며, 오해와 미움도 있다. 그래서 거기에는 불화마저 잠재되어 있다. 그렇다고 해서 화해의 가능성조차 사라진 것은 아니다. 그러나 죽음은 이 모든 잠재태와 가능태를 일거에 소멸시켜버린다. 영화는 이처럼 폭압적인 죽음이 어느 날 이유도 없이 도둑처럼 엄습할 가능성에서 우리도 자유롭지 못하다는 사실을 넌지시 알려준다. 용산, 영도, 밀양, 진주, 강정에서, 쌍용차나 콜트 공장에서 어떤 신도 들어주지 않는 메마른 목소리가 아직도 가시지 않고 있다. 희미한 시각적 이미지와는 달리 무엇보다 강렬한 현재형으로 실감되는 총소리가 이 영화를 청각적으로 지배한 것처럼, 보이지 않지만 그래서 더 매서운 불안이, 언제 나에게 들이닥칠지 모르는 파멸이 영화관 밖을 나서면서도 지방(紙榜)을 소지(燒紙)하지 않은 찝찝한 제사처럼 우리 몸에 엉겨 붙어 있는 것이다. 소지는 스크린 속 피해자들을 위해서 감독이 우리를 대신해 드린 가장 경건한 애도일 것이다. 그러나 스크린 밖, 의자에 앉은 우리들의 불안은 그렇게 깨끗이 태워 없앨 수 있는가? 그런 점에서 이 영화의 마지막 소지 장면들은 실제 역사를 재현한 것이 아니라 누구도 가닿을 수 없 는 판타지를 제주어와 표준어의 간극만큼이나 적나라하게 보여준 것인지도 모른다. 아니, 뜨거운 감자를 목구멍으로 밀어 넣기 어렵듯 애도를 위한 제의(祭儀)는, 지금, 아직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이 영화는 그만큼 직핍하게 보여준 것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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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거운 감자를 삼키기 위한 제(祭)[지슬] – 영화부산](https://fb.snsmodoo.com/wp-content/uploads/2015/09/18_35.jpg)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