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해는 돌아갈 수 없는 욕망의 바다였다. 황해를 건넌 구남은 구원은 고사하고 대 살육의 한 가운데에 서게 된다.

<황해>(2010)
<황해>는 사회 시스템이 개인을 어떻게 포섭하고 규율하고 폐기하는 가를 잘 보여준다. 연변에서 택시 운전을 하는 구남(하정우 분)은 한국으로 돈 벌러 간 아내의 연락을 애타게 기다리지만 수개월째 소식이 없다. 택시 운전으로 번 돈은 사채를 갚기에 턱없이 부족하다. 불법 마작판을 드나들어 보지만 신통치 않다. 구남을 지켜보던 살인청부업자 면가(김윤석 분)는 한국에 가서 누군가를 죽이라는 제안을 한다. 빚을 갚기 위해, 그리고 아내를 만나기 위해 밀항선에 오르는 구남. 하지만 구남은 한국에서 뜻하지 않게 누명을 쓰고 애처로운 사투를 벌이게 된다.
구남에게 일어난 일련의 비극은 그들 부부가 황해 너머의 이데아인 한국을 욕망한 데서 시작되었다. 조선족인 그들은 한국과 모어를 공유하는 데다이데아인 한국을 욕망한 데서 시작되었다. 조선족인 그들은 한국과 모어를 공유하는 데다, 공동체에서 물려받은 밈(meme, 일종의 문화적 유전자) 또한 한국과 공유하는 것이었다. 때마침 중국에 닥친 시장개방의 물결은 한국을 ‘약속의 땅’으로 비추었을 것이다. 조선족이란 한국에 뿌리를 둔 디아스포라 아니던가. 자본주의로 점철되는 ‘세상’은 욕망을 미끼로 구남 부부를 포섭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세상은 이내 그들을 막으며 통행증(비자)을 요구한다. 구남은 어쩔 수 없이 거액의 사채를 얻어 통행료를 내고 아내를 먼저 한국으로 보낸다. 하지만 첫 단추를 잘못 채운 비극은 나락을 향해 곤두박질친다. 아내는 사채를 갚아야 할 돈을 송금하지 않고 연락마저 끊긴다. 구남은 절망 말고는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빚 독촉하러 온 이들의 말을 들어보자.
“니 눈 니 오장육부 싸그리 꺼내다 팔고, 니 딸래미 어디 짐승 같은 새끼들한테 갖다 팔아도 원금 회수가 안 돼.”
구남은 무력하다. 이때 구세주의 탈을 쓴 면가가 등장해 구남에게 청부살인을 제안한다.
“구남아, 니 한국 가 사람 하나 죽이고 오라.”
구남은 불손한 제안을 단박에 거절하지만 며칠 지나지 않아 면가의 제안을 받아들인다. 언뜻 봐서는 구남이 자신의 행동을 ‘선택’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오히려 구남이 ‘선택’당했다. 밤낮으로 택시를 몰아 번 돈을 다 갖다 바쳐도 이자조차 갚지 못하는데 무슨 선택을 달리하겠는가. 이제 <황해>는 서막을 걷어내고 구세주인 줄 알았던 면가가 악마였으며, 이데아인 줄 알았던 한국이 지옥임을 폭로하기 위해 본격적으로 질주한다.
황해는 돌아갈 수 없는 욕망의 바다였다. 황해를 건넌 구남은 구원은 고사하고 대 살육의 한 가운데에 서게 된다. 자신이 죽여야 할 타겟을 다른 괴한이 빼앗아 살해하게 되면서 사건은 한없이 꼬여간다. 누가 죽이든 상관이야 없겠지만 구남에게 필요한 것은 타겟의 손가락, 즉 살해의 증표였다. 구남은 이미 죽은 타겟의 손가락을 자르는 과정에서 의도치 않게 다른 괴한을 죽이게된다. 그러는 동안 경찰의 희생마저 발생하며 사건은 걷잡을 수 없게 된다. 애초에 살인을 사주한 태원(조성하 분)과 면가는 증거인멸을 위해 구남을 제거하려 하고, 그들 사이의 알력까지 더해져 도망과 추격이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구남은 사건의 전모를 모른다. 지난 일들을 열심히 복기해 보지만 좀처럼 가닥을 잡을 수 없다. 온 세계가 조직적으로 자신을 삼키려 하는 데, 미약한 개인이 어떻게 당해내겠는가. 도망에 지친 구남은 구원받기를 스스로 포기하기에 이른다. 대신에 구남은 악의 근원을 밝히기 위해 자신을 쫓던 이들을 되 쫓는다. 하지만 끝내 악의 근원에는 닿을 수 없었고, 체제에 기생하며 충실한 개를 자임하던 면가와 태원의 죽음을 확인하는 것으로 추격전은 막을 내린다. 죽음을 각오하고 덤빈 구남은 그의 각오대로 황해 바다에 수장된다. 세상은 끝내 구남을 동정하지 않았다.
<황해>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인간 군상은 욕망에 눈이 멀어 서로를 해치는 데 열심이다. 그들에게 타인의 절박함이란 그저 좀 더 쉽게 돈을 버는 기회에 지나지 않는다. 태원이나 면가의 악행은 말할 것도 없고, 이제 막 한국에 도착한 구남에게 돌아가는 배편의 접선 장소를 엉뚱한 곳으로 알려주는 일당들이 그렇다. 우여곡절 끝에 새로이 구한 밀항 브로커도 인면수심이라, 중국으로 돌아가려는 구남을 도쿄행 화물칸에 던져 넣는 악행을 저지른다. 공을 세우는 데 눈이 멀어 구남을 놓치는 것은 물론이고 오발로 동료를 쏘는 경찰도 마찬가지다.
<황해>가 ‘영화는 잘 만들었지만 지나치게 잔혹해서 불편하다’는 세간의 평가에 나도 동의한다. 관객은 손도끼가 난무하는 사실적인 장면들을 보면서 장르적 쾌감을 느끼기보다는 외면을 선택한다. 그러나 잔혹함은 외면의 구실을 제공하는 것일 뿐, 우리가 정말 외면하려는 것은 <황해>가 비추는 현실감 넘치는 사건과 인물들이 처한 끔찍한 상황일 것이다. <황해>는 마치 어젯밤 뉴스에 나온 사건들을 모아 재구성한 것처럼 기시감이 드는 내용으로 가득 차 있다. 그래서 <황해>를 외면하는 것은 한국의 현실을 외면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황해에 수장될 수밖에 없었던, 택시운전사/무산계급, 조선족/디아스포라, 살인자/범죄자의 정체성을 가진 한 청년이 세상으로부터 버림받는 비극적인 인생을 함께 슬퍼하지 않는다면,
<황해>가 그리는 비정한 세상을 관객 스스로 완성하는 셈이다.
<황해>가 던지는 질문은 명확하며 섬뜩하다. 살아 있는 이유가 ‘죽어도 빚을 다 갚을 수 없기 때문’일 리 없는, 안전한 극장의 객석에 앉아 ‘타인의 고통’을 즐기러 온 우리에게 질문한다. 만약 당신이 구남과 같은 처지에 놓인다면, 당신은 어떻게 세상의 지옥을 벗어날 수 있을까? 이 흉흉한 세상을 살아가며 언제고 우리도 구남 같은 처지에 놓이지 말라는 법은 없다. 어쩌면 우리가 이미 잠정적인 무산계급이고 디아스포라이며 범죄자 아니던가?
서울의 치부를 고스란히 담은 <황해>가 남기는 뒷맛은 무척이나 씁쓸하다. 언뜻 보면 구남이 희생자요, 면가와 태원이 가해자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들 모두가 세상이 부추기는 욕망에 충실했던 희생양이다. 천민자본주의 혹은 신자유주의란 이름으로 불리는 이 세상은 민중의 고혈을 빨아먹으며 제 몸집을 불린다. 한없이 주린 살인귀와 같다. 우리는 그러한 세상을 살아가고 있으며, 그러한 세상을 구성하고 용인한 것 또한 우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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