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USAN NEW WAVE – 도시의 삶 <재>

BUSAN NEW WAVE – 도시의 삶 <재>

파국, 즉 사라지는 것보다 더 두려운 일은 희미해져가는 것이 아닐까.

“ 도시는 폐허가 되었고, 사회적 제의는 공허하고, 사물은 병적일 정도로 차갑다.” —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 1892~1940)

2013년 부산독립영화제에서 우수상을 수상한 오민욱 감독의 실험영화 다큐멘터리 <재>에는 잿빛 부산 도시의 모습이 등장한다. 다큐멘터리는 황령산의 암석들을 클로즈업하는 이미지들로 시작해 부산시민공원의 전경, 아파트 재건축 현장, 빌딩 숲 사이, 기중기와 크레인의 둔탁한 이미지를 천천히 반복하는 장면들로 나열된다. 그리고 갑작스럽게 불안한 파열음과 함께 빠른 속도로 이미지들이 편집되면서 폭파직전에 다다른 도시를 비춘다. 이제 도시에는 귀를 찌르는 쇳소리, 자동차 소리와 기이한 몸짓을 하고 있는 기중기만 눈에 띌 뿐이다. 그것들이야말로 이 도시에서 유일하게 살아있는 것처럼 보인다.

<재>에는 수많은 인간들이 도시공간에 등장하는데, 그 중 공사 현장에서의 노동자의 모습(얼굴)은 과히 인상적이다. 카메라가 노동자들을 비출 때 그들은 자신들의 존재를 인지하지 못하게 끔 프레임에서 재빠르게 빠져나가는 것을 알 수 있다. 어렵게 포착되는 노동자의 흐릿한 얼굴에서는 무표정을 엿볼 수 있다. 다 큐멘터리에서 정확히 인지되는 얼굴은 오로지 ‘만화’로만 나타난다. 노동현장에서 사고로 생을 마감하는 노동자. 카메라는 노동자의 처참한 얼굴을 차마 보여주지 못해 피로 흥건한 그의 신체만을 비춘다. 도시개발이라는 명목으로 자행되는 참혹한 사건을 노동자의 신체를 통해 보여주는 다큐멘터리 속 짧은 만화 한 편을 감상하고 난 후 생각한다. 도시에서의 인간의 삶이란 그럴 수밖에 없다고.

도시의 삶이란 수십 년간 지켜왔던 건물이 한순간에 붕괴되어도, 사회적 약속들이 순식간에 사라져도 모른 척 일상이 지속됨을 의미한다. 그래서일까. <재>에 등장하는 인간의 신체 또한 순식간에 붕괴/사라질 것만 같다. 하지만 그들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들의 신체는 어제보다 오늘 더 ‘희미하게’ 보일 뿐이다. 명확하게 감지될 수 없는 것은 인간의 몸뿐만 아니라 소리도 마찬가지다. <재>에서 유일하게 인식되는 목소리는 시민공원을 조성한 관의 계몽적인 목소리이다. 그 소리는 행정적 절차의 의식적인 목소리이지 시민의 목소리는 아니다. 시민들의 목소리는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없는 웅성거림으로만 들려올 뿐이다. 잿빛 도시에서 인간은 희미한 존재자로, 유령(무표정)의 얼굴로 도시를 배회하고 있다. 그로 인해 다큐멘터리의 엔딩에 이르러 그들은 거꾸로 걷고 거꾸로 뛰는 기이한 형상으로 포착된다.

파국, 즉 사라지는 것보다 더 두려운 일은 희미해져가는 것이 아닐까. 사라지지도 못한 채 유령으로 이 도시를 배회하는 것은 끔찍하리만치 절망적인 사실이 아닐까. 오민욱 감독은 영화 <재>를 통해 이를 잘 보여주고 있다. 무섭도록 차가운 시선으 로 말이다.

bf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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