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영화 <소원> 촬영중인 이준익 감독의 거침없는 세상이야기
2005년, <왕의 남자>로 1천만 관객을 불러 모으며 일약 스타 감독으로 떠올라 <라디오 스타><즐거운 인생><님은 먼곳에> 등 해마다 한 편씩 내놓는 기염을 토하던 감독 이준익. 한해 걸러 만든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으로 ‘쓴맛’을 보고 급기야 2011년 <평양성>을 내놓고는 느닷없는 은퇴선언으로 영화계를 떠나는 ‘시늉’을 하더니, 어물쩍 새 영화를 촬영하고 있다.
이준익 감독은 부산영상위원회와 각별한 인연을 이어가고 있다. 지난해 시작한 한-아세안협력사업에 적극 참여해서 부산과 아시아 영화의 연대와 교류는 물론 산업적 확산을 위한 여러 활동에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다. 더욱이 지난해 11월 필리핀 다바오에서 진행한 ‘한·아세안 차세대 영화 인재육성 프로젝트 (ASEAN-ROK Film Leaders Incubator: FLY)’ 마스터 클래스에도 참여해 아시아의 영화 청년들에게 순도 높은 메시지를 전수하기도 했다.
그 이준익 감독이 드디어 부산에 왔다. 이번에는 영화를 찍으러 왔다. 새 영화는 <소원>. 4월 경남 창원에서 촬영을 시작했고, 부산에서 50% 이상 찍을 계획이다. <영화부산>을 만드는 정책사업부 직원들이 이준익 감독을 만났다. 부산에서 촬영을 시작한 지 이틀째, 촬영팀 숙소가 있는 사상구 괘법동 부산 서부시외버스터미널 옆 모텔 골목 초입 유명 커피 전문점 야외 테이블. 때아닌 한기에 오돌오돌 떨면서도 활력 넘치는 이 빡빡머리 감독님은 영화와 세상 이야기에 거침이 없었다. 아주 다변에 달변이지만 시종 정연하고, 유쾌하다. (편집자)
“골짜기가 있어야 봉우리가 있듯이, 넘어지고, 인생의 골짜기에 빠지는 것을 반복해서 많은 굴곡을 만들어야 더욱 값이 나가지 않겠는가.”
은퇴한다더니 슬그머니 돌아온 건가?
인생은 굴곡이다. 욱하는 바람에 제 무덤을 팠고, 지난 2년 동안 벌을 섰다고 생각한다. 말을 번복하는 요즘 트렌드에 맞춰 다시 돌아왔다(웃음). 이율배 반적인 행동을 공개적으로 한 것에 대해 자기반성의 시간을 가졌다. 자발적 반성의 계기로 은퇴를 각오하였으나, 역시나 현장의 매혹적인 즐거움, 유혹에 다시 빠져들게 되었다. 살아서 은퇴라는 것이 어디 있겠는가, 죽어서 흙 속에 들어가는 것이 은퇴라고 생각한다(낄낄).
지난해 부산영상위원회의 한-아세안 협력사업 등에 참여해 주셨고, 영화 만드는일 이외 활동도 비교적 많이하고 계신데 혹시 소모적이라는 생각은 안 하나?
가진 것을 다 쏟아내고 소진해야 한다.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 빨리 써서 없애야 한다. 인간의 DNA 안에는 엄청난 능력이 잠재되어 있다. 모든 능력을 소모해야 또 다른 새로운, 잠재된 능력을 발견할 수 있다. 감춰둬 봤자, 똥 된다.
어쨌거나 작품이건 다른 일이건 활동 영역이 상당히 넓고 활력이 있 고, 또 진취적이다. 그런 힘의 원천은 무엇일까?
나는 엉덩이가 가볍다. ‘드라마(drama)’의 어원이 움직임이다. 움직이는 것을 드라마라고 한다. 움직이지 않는 것은 드라마가 없는 것이다. 난 계속 움직여서 드라마를 만들어 낸다. 한자리에 가만히 있으면 이미 죽은 것이다. 실존주의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는 죽어서 철학자가 아닌, 소설가로 남고 싶어 했다. 프랑스의 한 설문조사 결과, 고작 10%가 소설가로 기억한다고 한 다. 사르트르가 과거 철학자의 논리를 부정하여 실존주의 철학에 도달한 것과 같이 자신의 철학 또한 부정당하며 다른 철학이 탄생할 것을 알고, 변하지 않는 소설가로 기억되기를 원한 것이다. 이는 그릇된 욕망이라고 생각한다. 기존의 가치 부정과 현존하는 나를 부정하여 가치를 만들어야 한다. 나의 선배의 부정으로 내가 존재하듯, 나의 후배들이 또 나를 부정해 주길 기대한다.
작품 이야기도 좀 해야 인터뷰 구색을 갖출 수 있겠다(웃음). 초기 <황산벌><왕의 남자><라디오 스타> 등은 집중력이 돋보이는데 근작들은 다소 산만한 것 아니냐는 비판이 있는데, 감독으로서 욕심 많아진 탓이 아닐까?
자신이 아는 세계를 그리는 것이 감독의 역량에 충실한 일인데, 자신이 모르는 세계로 넘어가려는 욕구가 생긴다. 차분히 그 세계를 잘 알고 표현한다면, 간결하게 표현할 수 있는데, 잘 모른다는 불확실성 때문에 다소 산만한 것 아닐까. 골짜기가 있어야 봉우리가 있듯이, 넘어지고, 인생의 골짜기에 빠지는 것을 반복해서 많은 굴곡을 만들어야 더욱 값이 나가지 않겠는가. 초기 작품들은 40대의 집약된 삶의 경로만큼 뚜렷하게 그려냈지만, 최근 영화를 폭주하듯이 찍어내는 감독의 입장에서는 절룩거리고, 골짜기에 빠지며 많은 굴곡을 만들고 있는 중이라 생각한다.
이준익의 영화는 어떤 면에서 보면 비장하고 무겁고 아픈 소재임에도 관객들에게는 어렵지 않게 ‘위로’가 되는 매력이 있다고들 한다. 그 바탕이 뭘까?
내 작품의 특징은 풍자, 해학, 익살이다. 서양에서는 이를 유머, 위트, 조크라고 한다. 한국의 전통공연 중의 하나인 마당극에서도 놀이문화의 풍자, 해학, 익살을 찾아볼 수 있다. 안동의 ‘양반전’ 등 다양한 전통극은 끊임없는 권력자를 향한 조롱과 스스로를 방어하는 익살을 담고 있다. 서양에서는 랩, 힙합 등으로 삶의 고단함을 떠드는 것은 이미 우리 전통 광대놀이 안에도 존재하고 있었다. 우리의 것은 우리가 배운 서양 문명의 가치보다 열등하지 않았으나, 과학 기술의 뒤늦음으로 우리 것의 가치가 폄하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다. 요즘 많이 이야기되는 콘텐츠, 스토리텔링은, 현실화시킬 수 없는 것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이미 존재했던 것인데 인식하지 못하고 있던 것에서 나온다.
감독님의 영화에는 시대상과 사회적인 메시지를 내포하고 있는데, 역사나 사회문제 등은 따로 공부를 하나 아니면 평소 관심사의 반영인가?
나는 책을 잘 못 읽는다. 요즘은 시나리오도 잘 못 읽겠더라(웃음). 사실은 책을 잘 못 믿겠다. 말보다 글이 거짓말을 더 많이 한다. 말은 그 사람의 뉘앙스를 듣고 거짓말을 알 수 있지만, 그 말을 적은 활자화된 힘은 마치 진리인 양 착각하게 한다. 모든 글은 누군가의 말을 받아 적는 것이다. 예수님, 부처님, 공자에 관한 글도 제자 혹은 누군가가 다 받아 적은 것 아니냐. 책을 못 읽어서 이런 궤변을 늘어놓는 것이다(웃음). 그런데 내 주변에 책을 많이 읽은 사람들이 많다. 나는 그 사람들 말을 잘 듣는다. 직관, 통찰력은 주변에서 주워들은 이야기로 만들어진다. 특히 역사와 관련된 인식과 같은 것, 이것이 영화를 찍어가는 나의 지식의 토대일 수 있다. 역사 안에 모든 것이 다 있다.
데뷔는 오래전이지만 불혹의 나이에 감독으로서 본격 작품 활동을 시작했는데, 그에 따른 자신만의 작업 방식이나 노하우가 있다면 어떤 게 있을까?
공자 왈,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을까 걱정하지 말고, 내가 남을 알아보지 못할까 근심하라’고 했다. 영화감독은 이 말만 알면 다 잘 할 수 있다. 나는 영화와 관련하여 연출, 제작, 시나리오 수업 등 학습적인 과정의 경험 없이 감독이 되었다. 돌이켜보니 주변에 영화 전문인이 아주 많았다. 나는 이 영화 전문인들의 말을 잘 듣고, ‘레디, 액션, 고’를 잘 하면 됐다. 재능 있는 사람을 잘 알아보고 선택만 잘 하면 된다. 어떻게 내가 다 공부해서 할 수 있겠나. 남의 머리 70%, 내 머리 30% 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감독 아무나 한다’고 떠벌리고 다닌다. 바로 내가 그 ‘ 아무나’이기 때문이다.
올해로 감독 데뷔(1993년 <키드캅>으로 데뷔) 20년째다. 당시와 비교하면 ‘이준익’은 어떤 변화가 있는가?
말을 잘하게 되었다. 과거에는 말만 잘하는 사람이었는데, 요즘은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해도 사람들이 경청한다. 따지고 보면 성공한 사람들의 말을 경청하는 나쁜 세상이 된 것이다. 성공한 사람이 각색해낸 미담에 현혹되거나 착각하지 않기를 바란다. 나의 말도 앞뒤가 안 맞는 것, 꾸며내는 것도 많다. 내가 세상을 바꾸겠나. 그냥 사는 것이다.
작품 내용이나 감독으로서의 입지나 ‘非주류’에 대한 생각을 이미 몇몇 인터뷰에서 말씀하셨는데, 재탕 한번 해주시기 바란다.
난 주류가 아니다. 옛날도 지금도 비주류라고 생각한다. 비교가치 안에서 주류로 떠밀려진 것뿐이다. 인간은 2명만 모여도 계급이 생긴다. 나이, 외모, 지식계급 등. 민주주의 사회에서도 아닌 듯하지만, 어디서나 존재하고 있다. 누구나 성장 과정 안에서는 비주류 일 수밖에 없는데, 나는 주류가 되기 위해서 발버둥친 것은 없다. 학창 시절때 공부도 못 했기 때문에 주류가 될 수도 없었다. 고등학교 때 반에서 50등…, 예비고사 340점 만점에 162점이었다(웃음). 그림을 좀 그려서 대학에 들어갈 수 있었고, 학벌이나 돈, 집안…, 무엇 하나 내세울 것이 없는데 어떻게 주류가 될 수 있겠는가. 20세기 대한민국은 학벌이 주류와 비주류를 구분하는 기준이었으나, 21세기는 더 이상 학벌 이이를 보장하지 않는다. 어찌 됐든, 나의 성장 과정을 보면 난 비주류이고 나에게 주류는 조롱의 대상일 뿐이다. 나는 세상에 목소리를 내는 비주류 감독이다.
이준익 감독은 고인이 된 정승혜 대표는 물론 ‘우군’이 막강한 것으로 익히 알려져 있는데, 그들과의 관계가 일반적인 비즈니스와는 다른 네트워크의 힘이라고 한다. 정체가 뭔가?
씨네월드, 영화사 아침, 타이거픽쳐스 등에서 같이 일을 했거나 하고 있는 셀 수 없는 많은 동지들이 있다. 고인이 된 정승혜를 비롯한 조철현, 이정세, 오승현 등과 30년 가까이 영화를 하며 같이 걸어온 동료, 후배들…, 영원히 같이 가는 사람들이다. 정승혜는 그녀가 죽었든 살았든 언제나 함께 가는 동지이다. 영화는 동지와 함께하는 것이다. ‘동지’는 같을 ‘동’에 뜻 ‘지’, 뜻이 같은 사람들이다. 나는 ‘마음’이 맞는 사람과 일하지 않는다. 마음은 변하는 것이니…, ‘뜻’이 맞는 사람과 일한다. 때때로 속상한 일도 생기지만, 끝까지 간다. 뜻이 맞으니. 뜻이 맞는지는 한 10년은 지나봐야 알 수 있다. 모든 일은 10년은 해야 인정을 받고, 20년을 하면 존중받으며, 30년 하면 존경을 받는다. (*고 정승혜 대표는 약 1천 편에 달하는 영화 광고와 카피라이터로 명성이 자자한 한국 영화 마케팅의 ‘역사’이며, 이준익 감독과는 오래 동고동락한 영화 동지로, 암으로 투병하다가 2009년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 많은 영화인들이 안타까워 함-편집자)
국내외를 막론하고 영화로 찍어보고 싶은, 마음에 담아둔 곳이 있다면?
몽골. 몽골 사막화를 막기 위해 나무를 심는 NGO인 ‘푸른 아시아’ 홍보대사를 맡아서 몽골을 여러 차례 가봤다. 그 몽골 기마족의 기운을 받아서 나는 요즘 도심에서 오토바이를 탄다(웃음).
몽골의 매력이 뭔가?
일본의 역사 날조로 단군을 역사가 아닌 신화로 치부해 버렸는데, 단군은 역사다.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역사책이 2,700년 된 것인데, 일본이 조선을 통치하고 국민들을 포섭하기 위해 삼국유사, 삼국사기만 남겨두고2,700년보다 오래된 역사책을 전부 분서갱유했다. 그렇게 한반도 역사의 흐름을 신화로 만들었다. 단군, 그 이전 시대에 대한 근거성은 만주 이북, 몽골의 풍습을 보면 몸으로 느낄 수 있다. 대표적인 것이 언어의 체계이 다. 우리는 주어, 목적어, 동사의 순서로 말하는데, 이와 같은 어순을 가진 지역은 일본, 한국, 몽골, 헝가리, 터키, 알래스카 인디언, 아메리카 인디언, 잉카 마야, 그리고 유럽의 서기 3~5세기경의 훈족이다. 이들은 우리와 같은 뿌리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 무대를 몽골로 하여 영화를 찍어보고 싶다. 흥행 감독이 되어야 가능한 일이지(웃음).
몇몇 영화에 카메오로 출연한 적이 있는데, 연기는 어떤가?
내 연기는 날로 발전중이다(웃음). <황산벌> <부당거래><라디오 스타>등… 내 연기가 날로 좋아지고 있다는 소문도 듣고 있다. 바람이 있다면, 환갑 지나서 <러브 액츄얼리>에 나오는 캐럴 부르는 노장가수 같은 역할을 해보는 것이다. 대머리 버전으로(웃음).
지난해 필리핀 다바오에서 열린 ‘FLY워크숍’에서 오토바이 타고 프랑스 파리까지 가보고 싶다고 했는데, 준비는 잘 진행되고 있나?
오토바이 탈 때, 가장 행복하다. 오토바이로 세계 일주하는 것이 꿈이다. 파리까지 갈 계획을 추진 중이다. 가능할지 어떨지 모르겠지만, 잘하면 가능할 것 같다. 먼저 통일이 되어야 하나? 독일도 그랬듯이 느닷없이 올 수도 있지 않을까(웃음). 오토바이를 타고 설악산까지는 가봤다.
언제나 당당하고 패기 있는 모습이 보기 좋다.
당당함에는 연습, 훈련이 필요하다. 나는 초등학교 5학년 때, 부끄러움이 너무 많아서 학교에서 발표시키면 전부 준비하고 일어나도 얼굴이 붉어지고 창피해서 발표를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어느날 부터 새벽 6시에 학교에 가서 아무도 없는 교실 칠판 앞에서 선생님 흉내도 내면서 한 시간씩 떠들고 훈련을 했다. 한 달 정도 그렇게 했더니, 발표하라고 하면 몇 마디는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 훈련 끝에 중학교 때는 오락부장도 했다. 당당함에도 훈련이 필요하다.
지난 3월 발족한 사단법인 한국영화감독 조합 대표를 맡았는데, 가장 중요한 현안은 무엇인가?
영화계에도 새로운 인력을 유입시키는 것이 산업 유지의 관건이다. 새롭게 진입하는 스태프를 구하기 상당히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영화 관련 학과가 있는 대학이 수십 개이고, 수백 명의 졸업생이 배출되지만 열악한 환경과 지독한 저임금으로 학창시절 꿈은 꿈일 뿐, 정작 현장에서는 미래를 설계할 수 없는 현실 앞에 젊은이들이 영화계를 떠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이런 괴멸은 곧 자본 집단의 무덤과 같고 콘텐츠 개발의 악화를 낳을 수밖에 없다. 건강한 생태계 회복이 절실한 시점이다. 동반 성장하기 위해 다른 영화단체들과 연대하고 활로를 모색하겠다.
자, 이제 <영화부산>의 본색이다. 이른바 ‘영화도시 부산’에 대해 한 말씀 부탁한다.
부산? 잘 될 일만 남은 거 아닌가? 부산시가 적극적인 지원 정책을 펴고 있고 부산영상위원회도 근래 들어 본격적인 사업들을 추진하기 시작했으니까 속속 성과가 드러나겠지. 앞으로 한 10년은 이 추세로 더 잘해야지, 그 러면 명실상부한 영화도시로 인정받게 될 것이고. 30년 지나면 존경받는 영화도시가 될 거고…. 나는 일개 감독이지만 부산이 영화 도시로 존경받는 날이 올 때까지 부산영상위원회가 하라는 대로 하겠다(웃음). 영화진흥위원회도 곧 부산으로 오는데 이 또한 지난 10여 년의 성과로 볼 수 있다. 이제는 부산이 책임 의식을 가져야 할 시기다.
촬영하고 있는 새 영화 <소원>을 간단히 소개해 달라.
지울 수 없는 사고를 당한 사람의 희망은 일상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 일상이 편안하거나 행복하지 않고, 고단하고 힘이 들어도 감당하기 어려운 큰 사고 후에는 그런 일상 조차도 아주 소중한 것이 된다. 행복이라는 것은 그 작은 일상이 훼손되지 않는 것, 그것을 유지하는 것이 영원히 행복해지는 것이다. 일상을 회복하기 위한 어둡고 긴 터널을 지나고, 작은 일상 속에서 행복을 맞이하는 것이다. “밥 먹었니?”라고 물을 수 있는 사소한 그것이 바로, 사람의 <소원>이다. (*현재 촬영중인 영화이기 때문에 줄거리와 주요 내용은 편집자가 생략함)
“어찌 됐든, 나의 성장 과정을 보면 난 비주류이고 나에게 주류는 조롱의 대상일 뿐이다. 나는 세상에 목소리를 내는 비주류 감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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