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은 치유가 필요한 우리의 상처가 무엇인 지 생각해보는 성찰의 시금석이 될 수 있는 근대의, 그리 고 우리의 새로운 신화가 아닌가 생각된다

<올드보이>는 오대수(최민식 분)가 ‘누가 무엇 때문에 15년 동안 자신을 감금했는가?’를 추적하고 있는 영화다. 그가 감금당한 이유는 고등학교 시절, 전학을 가는 날 목격했던 그것을 친구에게 ‘말’로 내뱉는 순간 이미 시작되었다. 오대수는 이수하(윤진서 분)와 그녀의 동생 이우진(유지태 분)이 학교에서 사랑을 나누는 장면을 보게 되고 이를 친구에게 말한다. 비밀이라는 단서를 달았지만 이 비밀은 전교생이 모두 아는 사건이 된다. 결국 이수하는 상상임신을 하는 등의 고초를 겪다 자살을 선택한다. 자살을 막을 수 있었던 우진은 갈등 끝에 그녀의 손을 놓아버린다. 그는 그런 자신을 죽도록 원망했지만, 그보다 더 앞서 이런 파국을 초래한 ‘범인’을 찾아 나서는 게 더욱 중요했다. 복수의 대상이 된 오대수는 영문을 모른 채 15년 동안 감금당해야 했고, 결국 이우진이 계획한 복수의 과정에 놓였음을 인지한다.

우진의 복수는 오대수가 자신과 똑같은 상황(근친상간)을 경험하게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우진은 “우리는 알면서도 사랑했지만, 너희도 알면서 사랑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던지고 죽음을 맞이한다. 누나를 사랑하는 자신과, 누나의 손을 놓아버린 자신의 이중적인 면모에 대한 자학적인 복수극을 끝낸 우진의 복수극이 다시 오대수에게 전이된 것이다. 대수도 그의 마음 속 분열(미도를 사랑하는 자신, 딸과 사랑을 나눈 자신을 분리하려는)이 우진과 동일한 구조를 취하기에 둘은 마치 한 사람이었던 것처럼 느껴진다. 우진은 자신이 죽음을 선택하는 것과 동시에 ‘복수’의 형태를 통해 대리된 자신의 욕망과 고통을 오대수에게 전이시킨 것이다.
하지만 오대수는 최면술사를 찾아가 자신의 기억(미도가 딸이라는 사실)을 지워달라고 애원한다. 금기된 것을 해결하기보다는 지워버리고 싶어 하는 이러한 욕망은 언제부터 왜곡되기 시작했고, 이러한 근친상간의 오래된 무의식적 금기가 자기 파괴적인 학대로 돌변하게 된 것은 무엇 때문인가? 그러한 지점에서 우리 삶에 ‘비극’이라는 서사가 개입된다. 금기를 서사화 하면서도 그것을 해결하지 못하게 그저 두는, 이 오래된 전통은 자신의 욕망을 해결하지 못한 패배한 인물들로 다양하게 재현되어 왔다.

<올드보이>(2003)
우리는 ‘오이디푸스’ 신화와 같은 서사를 통해 근친상간이라는 소재가 오래전부터 ‘비극’처럼 존재해왔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오이디푸스는 어머니와의 근친상간적 관계를 아는 순간 자신의 눈을 찌를 수밖에 없는 자학적인 ‘복수’를 한다. 마치 오대수가 자신의 ‘혀’를 잘라냈던 끔찍한 장면처럼 말이다. 그러나 우리가 신화를 넘어 일상의 문제에서 다시 살펴야 할 것은 죽음과 자학에 대한 공포와 금기시할 것들을 바라보는 충격의 문제가 아니다. 신화가 금기의 문제를 자신을 형벌하게 되는 끔찍한 복수의 형태로만 재현한다면, 영화는 그것을 넘어 우리에게 이 끔찍함이 인간의 내면이 가질 수 있는 한 부분이라고 ‘고백’의 형태를 취한다. 그래서 과거에는 없었던 새로운 주체의 문제와 고백의 형식은 인간의 존재론적 상황을 새롭게 보게끔 한다.
<올드보이>는 삶의 비극성을 단순히 서사로 남기는 것을 넘어서, ‘고백’의 방식에 대해 관객들의 생각을 되묻고 있다. 그래서 많은 영화들이 우리가 역겨운 것으로 만들었던, 그리고 말할 수 없는 것으로만 여겼던 것을 들여다보게 하는 ‘고백’ 장치가 될 수 있다. 그렇기에 영화는 아직도 정치적이며 현실비판적인 힘을 여전히 가동하며 단순한 소비물에 그치지 않는다. 이러한 독특성 안에서 우리는 고백을 들을 수 있는 자와 그것을 들을 수 없는 자로 이분화 된다. 괴물과 괴물 아닌 것은 그렇게 우리 자신 안에서도 분열하고 있다.
그러나 권력을 지니지 못한 자가 ‘고백’한다는 것은 자신의 죄를 끊임없이 만들고 형상화하는 고문에 가까운 것이다. 이 낮은 목소리들을 지닌 민중들에게 강요하던 것이 고백이었기에, 권력자들은 결코 낮은 목소리가 아님에도 그것을 지켜만 보아온 자신의 입에서 진실을 말하는 것을 고백하는 것으로 오인하는 아이러니한 행동을 하고 있다.
권력에 대한 금기시는 결코 영화와 같은 절망의 반복이 될 수 없으며, 우리는 좌절된 이야기에서 금기의 형태가 결코 어떤 사태를 해결하는 방편이 되지 못함을 살필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영화 <올드보이>는 침묵을 강요당했던 우리 대한민국의 오랜 현실을 비추던 무의식의 한 편린이며, 깊은 치유가 필요한 우리의 상처가 무엇인지 생각해보는 성찰의 시금석이 될 수 있는 근대의, 그리고 우리의 새로운 신화가 아닌가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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