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설국열차>가 <말세열차>가 된 이유는…

기획- <설국열차>가 <말세열차>가 된 이유는…

CJ·쇼박스·롯데·NEW의 해외 세일즈 관계자들이 말하는 지역별 해외 마케팅 전략

번역에 대한 흥미로운 일화 하나. 영화 번역 작가들은 흔히 번역을 ‘두 줄 타기’에 비유한다고 한다. 오리지널 자막과 자국의 언어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오가야 하는 역자의 역할이 마치 두 개의 줄을 넘나들며 타야하는 광대의 숙명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란다. 그런데 이 ‘두 줄 타기’가, 비단 번역의 세계에만 존재하는 고민일까. 오리지널 콘텐츠의 매력을 돋보이게 하면서, 동시에 해외 관객의 취향과 관심사를 반영한 세일즈 전략을 세워야 하는 해외 배급 관계자들 역시 이러한 줄타기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이 말이 다소 어렵게 느껴진다면 다음의 질문을 상기해볼 일이다. 천만 관객을 돌파 한 디즈니 애니메이션 <겨울왕국>(2013)이 국내 개봉 당시 원제인 <프로즌Frozen>을 그대로 사용했다면, 북미권 포스터처럼 ‘눈의 여왕’ 엘사와 안나 자매보다 ‘눈사람’ 올라프에 주목했다면, 과연 지금 의 성공을 거둘 수 있었을까. 그건 <프로즌>이 중국에선 <빙설 대모험>이며, 일본에서는 <안나와 눈의 여왕アナと雪の女王>이고, 대만에서 <눈과 얼음의 기이한 이야기>란 고유의 제목을 가지게 된 이유와도 맞닿아 있을 것이다. <겨울왕국>의 다양한 해외 배급·마케팅 사례를 지켜보며 한국영화의 해외 진출 전략도 궁금해졌다. 국내에서 많은 사랑을 받은 영화, <설국열차>와 <관상><자칼이 온 다>와 <신세계>는 해외 관객들에게 어떤 매력을 가진 영화로 비춰지고 있을까. CJ·쇼박스·롯데·NEW의 해외 배급팀 관계자들에게 자사 영화의 해외 마케팅 전략을 물었고, 흥미로운 답변이 돌아왔다. 그들이 들려준 일화를 이 지면에 전한다.

전세계를 순항 중인 설국열차 그 ‘포장’의 차이
완연한 봄이다. 하지만 지난 가을 한국을 떠난 빙하기의 ‘설국열차’는 여전히 전 세계를 순항 중이다. 프랑스부터 아시아 대륙(인도네시아, 홍콩, 일본, 태국 등) 을 거쳐 다시 유럽(독일, 벨기에, 네덜란드, 룩셈부르크 등)에 이르기까지, 봉준호 감독의 <설국열차>는 지난 반년 동안 15개국의 관객을 만나며 숨 가쁘게 달려 왔고 올해 6월 27일에는 북미권 개봉을 앞두고 있다. 그런데 그 흔적을 쫓다 보면, 어떤 승객(관객)이 탑승하느냐에 따라 이 열차(영화)의 겉모습도 조금씩 달라 진다는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설국열차>의 출발지인 한국에서, 영화 포스터의 중심부에 위치한 인물은 커티스 역의 크리스 에반스도, 윌포드를 연기한 에드 해리스도 아닌 열차의 설계자 남궁민수 역의 송강호였다. 한국과 미국, 프랑스가 제작에 참여한 이 글로벌 프로젝트의 중심에 한국의 톱 배우가 서 있다는 사실을 환기하는 이 포스터는 “나는 닫힌 문을 열고 싶다”는 도발적인 홍보 문구와 잘 맞아떨어진다. 반면 프랑스에서 <설국열차>의 ‘얼굴’인 포스터의 주인공은 열차 그 자신이다. 폐허가 된 인간 사회를 뒤로 하고 설원을 재빠르게 가로지르는, 하나의 국가와도 같은 기다란 열차라는 공간적 배경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본 것이다(이 결과물 또한 프랑스의 스태프들이 직접 작업한 아트워크라고 한다). 대만과 홍콩에선 열차의 이름이 바뀌었다는 점이 인상적이다. <설국열차>의 개봉명은 이들 나라에서 각각 <말일열차末日列車>와 <말세열차末世列車>다. 두 나라는 영화 속 설국열차가 ‘인류 최후의 열차’라는 점을 부각시켰다.


일본은 스타캐스팅과 가족물이 포인트
어떤 나라는 배우에, 어떤 나라는 공간에, 어떤 나라는 서사적 설정에 주목했다. <설국열차>라는 한 편의 영화를 소개하는 데에도 꼬리칸과 엔진칸 만큼이나 다른 ‘포장’의 차이가 존재하는 것이다. 하지만 분명한 건 그게 어떤 방식이든 극장가를 찾는 각 나라 관객들의 눈높이와 취향에 가장 가까운 모습으로 포장되어 있을 거라는 점이다. 한국과 지리적으로 가장 가까운 이웃나라이자 한국영화와 대중문화에 대한 인지도가 높은 일본의 경우, 어떤 배우가 출연하는지가 세일즈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 롯데 해외투자배급팀의 한민형 과장은 <자칼이 온다>에 대한 일본 관객들의 반응을 보고 스타 캐스팅의 중요성을 실감했다고 한다. “JYJ의 멤버인 김재중의 인기가 대단하더라. 포스터 시안을 정할 때에도, 우리 쪽에서 다양한 안을 제시했는데 일본 관계자들은 배우 김재중이 가장 돋보이는 포스터를 골랐다. 당시 JYJ가 전속 계약을 둘러싼 분쟁 때문에 활동을 원활하게 하지 못했다. 그들이 방송과 음반 작업에 적극적으로 나설 수 없는 상황에서 김재중이 출연한 <자칼이 온다>가 개봉하니 팬들의 입장에서는 좋아하는 스타를 자주 볼 수 없다는 갈증이 해소되는 지점이 있었던 것 같다.” 가족 중심의 문화를 형성하고 있는 일본이기에 가족물로서의 특성을 내세우는 것도 중요한 마케팅 포인트가 될 수 있다. NEW의 해외 배급을 담당하고 있는 김태원 과장은 “<7번방의 선물> 의 경우 감방과 죄수들의 다양한 개성을 내세웠던 한국 버전 포스터와 달리 일본에선 용구(류승룡)와 예승이(갈소원)의 부녀 관계에 초점을 맞춘 포스터를 사용했다.”고 말했다. 코믹하고 개성 넘치는 인물들보다 아빠와 딸의 다정한 모습에 일본 관객들의 마음이 움직일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장르영화가 대세인 동남아시아
한편 동남아시아 지역에선 공포물과 코미디가 인기다. “컨셉이 독특한 공포물도 좋아하고, 한국 관객들을 쉽게 끌어 모으기 힘든 슬랩스틱 코미디가 동남아 시장에선 잘 먹힌다.”는게 CJ 해외영업팀 김성은 팀장의 말이다. 그의 말처럼 CJ가 세일즈한 영화 중 호러와 코미디 장르를 결합시킨 2011년작 <오싹한 연애>, 그리고 웹툰이라는 독특한 소재로 승부한 공포영화 <더 웹툰: 예고살인>은 베트남 박스오피스에서 좋은 평가를 얻었다. 특히 <더 웹툰: 예고살인>의 흥행 수익은 베트남에서 <설국열차>를 앞질렀을 뿐만 아니라 역대 베트남에서 개봉한 한국영화의 수익을 통틀어 가장 좋은 성적이다. NEW 역시 시각장애인을 앞세운 독특한 스릴러 <블라인드> (2011)가 동남아에서 기대 이상의 관심을 받는 상황을 보며 “아직까지 동남아에선 드라마보다 장르영화에 대한 관심이 더 높다.”(김태원)는 점을 느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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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시장의 높은벽, 결국 중요한 것을 ‘좋은 이야기’
국가적 차원의 검열 문제가 있는 중국은 쉽지만은 않은 시장이다. 스릴러, 호러 장르의 영화를 정서상 받아들이기 힘들고 사극 장르의 영화·드라마가 워낙 많아 같은 장르의 영화로는 경쟁 력을 갖추기 어렵다고 관계자들은 말한다. NEW의 김태원 과장은“ <헬로우 고스트> 개봉 당시 벽 위에 귀신이 떠 있는 장면은 확실히 안 된다고 하더라. 결국 블러 처리를 하는 것으로 넘어갔 다.”고 했다. CJ의 김성은 팀장 또한“ <설국열차>에서 창이 등장인물의 몸을 뚫고 나가는 장면 을 포함한 50초가량이 편집됐다.”며 폭력의 수위가 높은 영화이기에 걱정을 많이 했지만, 1분 안쪽으로 편집됐다는 점이 다행이라고 밝혔다. 쇼박스의 2013년 흥행작 <관상>은 얼굴을 읽는 다는 흥미로운 소재를 가지고 있지만, 코스튬 사극이 너무 익숙한 중화권(중국, 홍콩, 대만) 관 객들에겐 식상한 소재로 비춰질 위험도 있었다고 정수진 과장은 말한다. 하지만 결국 중요한 건 국적에 관계없이 관객들을 공감할 수 있게 하는‘ 좋은 이야기’다.“ <관상>은 영화 중반 이후부터 역사적 배경이 중요하게 부각되는 작품이기 때문에, 중국 관객들이 그런 부분을 이해하거나 따 라가기는 솔직히 쉽지 않았다고 하더라. 그런 애로사항은 있었지만, 평소 영화를 많이 보는 관 객들은 무척 재밌게 봤다고 하더라고. TV쪽으로 판매가 잘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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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영화 특유의 색채와 장르적 개성으로 승부하는 유럽.북미시장
유럽과 북미 시장의 경우 감독의 네임 밸류와 장르, 이 두 가지가 키워드다. 롯데의 한민형 과장은 “장르영화냐, 아니냐에 따라 그쪽 시장에선 판매율이 달라진다.”고 말했다. 대규모 예산과 최첨단 기술, 세계적인 스타들로 무장한 할리우드의 블록버스터와 같은 방식으로 경쟁하기보다는 한국영화 특유의 색채와 장르적인 개성을 어필하는 데에 승산이 있다고 본 것이다. 이에 따라 북미·유럽 시장에 진출하는 영화들은 제목과 포스터로 대변되는 겉모습을 전략적으로 바꾸는 경우가 많다. <조선명탐정: 각시투구꽃의 비밀>의 영어 제목은 <디텍티브 KDetective K>다. “장르물의 느낌을 더욱 강하게 살렸다.”는 게 쇼박스 정수진 과장의 설명이다. 서극 감독의 블록버스터 <적인걸> 시리즈의 영어 제목이 <디텍티브 디Detective Dee>라는 점도 공략 포인트로 작용했다. 인기있는 아시아권 영화의 제목을 떠 올리게 해보다 낯설지 않은 영화로 느껴지도록 한 것이다. 배우 최민식, 황정민, 이정재의 얼굴만으로도 강렬한 느낌을 선사했던 <신세계>의 북미권 포스터 역시 더욱 장르적인 느낌으로 변화를 줬다. “아시아권 영화의 액션 누아르 장르를 선호하는”(김태원) 관객의 취향을 고려해 배우보다는 작품의 분위기를 연상하게 하는 컨셉의 포스터를 썼다. 한편 <설국열차>는 유럽 지역에 진출하며 봉준호 감독의 이름을 앞세웠다. 영화의 프랑스 배급을 맡은 와일드 사이드의 마뉘엘 쉬슈 대표는 봉준호 감독을 중요한 마케팅 포인트로 잡은 이유에 대해 “그가 프랑스 시장에서 사랑받는 감독이라는 사실이 관객을 불러 모으는 데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한국영화계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감독과 할리 우드, 유럽의 A급 배우들과의 만남’이라는 컨셉이 <설국열차>를 지켜보는 유럽· 북미권 관객들에겐 신선한 인상을 남겼나보다

(2013)

<설국열차>(2013)


해외 관객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매력적인 마케팅 전략은?
하지만 이러한 마케팅 전략도 변화를 겪고 있다. CJ의 김성은 팀장은 “감독의 네임 밸류와 장르적 특성만으로 해외 시장을 공략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고 말 한다. 칸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이름있는 감독의 영화가 일부 마니아 층의 열광적인 지지를 받을 순 있으나, 그 점이 흥행수익을 보장해주지는 않는 다는 이유에서다. 그런 점에서 <해운대>의 성공이 고무적이라고 김성은 팀장은 말했다. 해외 시장에서 <더 라스트 데이The Last Day>로 제목을 바꾼 <해운대> 는 “처음 세일즈했던 가격의 네 배 정도의 추가 수익”을 올렸다. <해운대>가 롤랜드 에머리히 감독의 <2012><투모로우>를 떠올리게 하는 재난 블록버스터라는 점을 관객들에게 주지시키는 게 중요했다. “한국은 할리우드영화와 장르적 특성이 중첩되는 경우가 많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까지는 ‘한국영화’ 하면 ‘할리우드 흉내를 낸 영화네, 하지만 우리나라에선 안 먹힐 걸’이라는 인식이 해외 관객들에게 있었던 것 같다. 그러한 선입견을 깨는 계기가 된 작품이 바로 <해운대>다.” 김성은 팀장의 말처럼 이제 해외 진출을 준비하는 배급 관계자들의 과제는 “해외 시장에서의 대규모 개봉과 유통 구조”에 대한 고민까지 이르렀다. 더 큰 목표가 생긴 만큼, 해외 관객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보다 매력적인 마케팅 전략도 필요할  것이다. 4사의 2014년 대표 라인업인 <명량:회오리바다>(CJ)와 <군도:민란의 시대>(쇼박스), <해적: 바다로 간 산적>(롯데)과 <해무>(NEW)의 해외 마케팅 전략이 사뭇 궁금해진다.
bf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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