神에게 말을 건네는 법 : 머리카락은 (그냥) 떨어진다 -이창동의[밀양]과 이냐리투의[21그램]

神에게 말을 건네는 법 : 머리카락은 (그냥) 떨어진다 -이창동의[밀양]과 이냐리투의[21그램]

환상은 도착(佳關을 낳는 법이지만, 지혜는 삶에 착실(着實)하게 끔 우리의 몸을 되돌려 놓는다.

1) 김영민,『세속의 어긋남과 어긋냄의 인문학』(글항아리, 2011).
2) 김상봉,『그리스 비극에 대한 편지』( 한길사 2003), 251 쪽.
3) 잭 넬슨 폴마이어,『예수를 배반한 기독교』, 한성수 옮김 (한국기독교연구소 2013.)

종교에 대한 가장 오래된 비판의 하나는 현실에 내려 앉지 못 한다’ 는 것이다, 열매를 맺지 못하는 나무는 찍어 불 속에 넣어야 한다고 하듯 그러나, 역사적으로 그 어떤 종교가 무슨 실학(實學)의 일종이었던 적이 있는가? 그래서 차라리 바로 이 무능속에 종교적 욕망이 꾸리는 세속이 옹글게 들어앉아 있다는 사실을 깨단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그 이념과 실천이 현실 속에 완전히 착근하거나 습합 한다면 외려 그것 이야말로, 지나치게 종교적이기 때문에 비종교적이 되어버리는 역설에 처하기 때문이다, 아는 대로, 종교는 늘 외부’에 대한 체계적이며 지속적인 환상이 아니 던가? 그러므로, 마치 노틀담의 곱추에게서 혹과 몸을 완벽히 분리할 수 없는 것처럼, 종교의 병적 환상과 그 신실한 열매를 완전히 떼어 놓을 수는 없는 것이다.

13_1내가 국내 감독으로서는 단연 최고로 꼽는 이창동의〈밀양> (2007)에서 종교는 종교적 주체인 신애를 스쳐 지나갈 뿐이다, 무릇 환상은 바로 이것이 그 장점이며 또 그 어두움인 셈인데, 그것은 마치 혜성처럼 한때의 환호를 자아내지만,우리 생활의 지남(指南)이나 그 성분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진 못한다, 물론 영화속의 이 종교는 ‘사건 (leveaement messianique)’ 처럼 다가와서,t상실(喪失) 의 고통에 허우적대는 신애의 심정과 태도를 일거에 바꾸어 놓는 듯싶다. 수난과 희생을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에 초대받은 그녀는 일시에 생활에서 벗어난 표정을 지으며 ‘사량을, 그래서 용서’를 떠든다. 그러나 아렌트(H. Arendt)의 지적처럼 심정만으로는 아직 아무것도 아니며 더 중요하게는 바로 그 사건의 진정성이라는 게 심정과 표정, 고백과 언설의 너머에서 모래알처럼 서로 버성기는 타인들의 몫이라는 데 있다, 다시 아렌트의 어법을 빌리면,‘사건의 계시성’은 주체의 몫이 아닌 것!

종교는 늘 외부에 대한 체계적 이며 지속적인 환상이 아니던가?

분분한 논의를 불러 일으켰으며,일부의 평자들에 의해 상투적인 해석을 낳아 놓았던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땅’ – 첫 장면에서 아들이 올려다보던 ‘하늘 ‘과 극적인 대조를 이루면서-을 향한다. 나는 내 책 〈영화 인문학〉(2009)에서 관심의 초점을 머리카락에, 그리고 신애의 머리카락을 잘라주던 그 소녀에 두고 조금 다른 해석을 제출하긴 했지만(여기에서는 그 상투적 해석에 주석을 다는 식으로 얘기를 이어가려고 한다. 그러니까, 날개가 없이 비상한 모든 것들은 결국 땅에 떨어 진다.’는 것.

신애(神愛)는 신(神)이 고통과 슬픔에 빠진 자신에게 말을 걸어왔다고 ‘생각’ 했다. 조금 서둘러 말하자면, (물론, 내 지론처럼 생각은 아직 아무것도 아니며) 특히 그 생각 속에 없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신’ 이라는 타자이지만, 세속이 선전하는 정서와 낭만의 종교 속에서 신은 늘 입속의 혀와 같은 동일자가 되어 버린다 신애는 자신의 생각 속에서 신을 만나려 했던 태세에서 이윽고 한 걸음 더 나아간다. 그 생각은 어느새 (피해자인 자신만이 용서할 수 있다는) ‘고집’으로 결정하고, 이 고집 속에서 신애의 신은 이번에는 의심의 대상, 급기야 원망과 심리적 대치의 대상으로 불러온다. 당연한 일이지만, 자신의 말에 응답하지 않는 신을 향한 신애의 말 걸기는, 그 허망한 실패는, 그 최종적인 수순으로 자해에 이른다. 자해에 대한 흔한 해석이 잘 보여주듯이, ‘생각 속의 신’을 구체화시키려는 강박은 흔히 자해라는 도착적 해결책으로 내몰려가기 때문이다. 자해하고 병원에 입원·퇴원한 수 신애가 삶의 입구에서 다시 만나는 것은 머리카락-‘종찬’이 아니라!-이며, 스스로 잘라 내는 머리카락 ‘땅’에 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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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개가 없이 비상한 모든 것들은 결국 땅에 떨어진다

이냐리투(Alejandro Gonzalez Inarritu)의 <21그램>

(2003)에서도 ‘머리카락’ 얘기는 계속된다. 영화 속의 잭은 회심한 전과자인데-그의 전과{前科)는 당연히 신애의 상실과 고통에 조응하는 심리적 구조를 마련한다-그는 회심한 자에게 전형적인 자기 구속적 맹신 속에서”하나님은 네 머리카락 하나의 움직임도 아신다(God knows when a single hair moves on your head)”고 외친다, 이와 같은 천인 합일(天人合一)의 종교적 확신 속에서는, 신애가 삶의 외부로 외출했다가 다시 삶의 내부로 들어오면서 그렇게 했듯이, 신의 섭리가 이슬방울처럼 맺혀 있는 머리카락을 감히 잘라서 땅에 던질 수가 없다.

그러나 영화 속의 어디에도 잭의’머리카락 신학’에 부합하는 섬세한 섭리는 포착되지 않는다. 회심에 의해 자의적으로, 과람하게 조형된 신애의 (용서)의도가 외력 가해자의 회심에 의해 산산이 부서진 것처럼, 역시 회심에 의해 제 마음대로 의도된 객의 잭의 종교적 선의는 현실의 돌출적·폭력적 개입에 의해서 무참하게 망가진다. 잭(신애)의 회심과 종교 신학적 이데올로기에 의해 급조된 선의는 자신을 가해자(피해자)로 만든 교통사고(아들의 유괴·피살)앞에서 한없이 졸아든 스칸달론이 된다. 삶의 근본은 어긋남이며 어쩔 수 없는 우리의 윤리는 ‘어긋냄’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누구도 감당할 수 없이 회전하는 삶의 회전목마는 아들이 엿보고 말을 건네려고 했던 삶의 ‘외부’를 마치 거대한 블랙 홀처럼 일거에 삼키는데 , 그(녀)가 마지막으로 매달린 종교 역시 그 초월적 외부를 지켜주지 못한다

13_2신은 특별하거나 예외적인 사건·사고 속에서 현현(顯現)한다

(그 모든 환상-환멸이 현실 속에서 풀어져가는 공식처럼) 잭은 예수가 자신을 배신했다고 절규한다. (이 공식의 비밀은, 늘 환상의 대상은 환상의 주체에게 관심 없다는 것이다.) 머리카락 한 올의 움직임도 감찰하는 신이라면, 자신의 갱생과 선의를 한 순간에 꺾어 버린 사고 (事故) 속에서 그 신은 자신을 배신한 것이다. 이러한판단 속에는 ‘사건과 사고 속에 현상(現像)하는 신이라는 오래 묵은 통념이 작동한다. 벼락을 맞아 죽을(은) 봄 이라거나 천우신조(天右神助)의 사건’ 이라는 등속의 숙어에서 짐작할 수 있는 것처럼, 신은 특별하거나 예외적인 사건 ·사고 속에서 현현한다는 것이다.

이런 종교 속에서 ‘일상’ 은 그저 무상한 짓일 뿐이고, 삶의 알짬이 될 수가 없다. 신은 삶의 지질한 일상 속으로 내려오시지 않으며, 따라서 신에게 말을 건네는 방식은 늘 초일상적이며 극적이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근대인들은 고독에 지쳤을 때 절대적 합일과 동일성에서 가망 없는 구원을 구한다”고 하였지만, 스스로의 생활양식으로 자신의 일상을 구원하지 못 하는 자에게 종교와 이데올로기는 허망한 환상-환멸의 공식을 되풀이하는 가족주의 극장에 불과하다

여담이지만, 신애와 잭의 종교에 국한해서 말하더라도, 이천 년 전 로마의 식민지 변방을 돌며 민중의 일상에 섞여 들었던 예수의 ‘하나님 나라’ 비전은 특별한 사건사고의 지평위에서 현실사회의 부조리와 모순을 일거에 해결해 줄 묵시종말론적 계책이 아니었다. 예수는 종교전통적 지배와 대치하면서 새로운 교조를 제시한 카리스마적 지배자이기 이전에, 로마와 성전종교로 대변되던 당대의 지배체계에 저항하면서 억압받던 민중의 현실 속에 새로운 삶의 대안을 제시한 해방자였던 것이다. 그의 비참한 죽음은 어떤 삶의 형식을 택할 때에 당연히 찾아올 삶의 마지막 모습일 뿐이었다.

영화, <21그램〉속에서 삶은 계속된다(Life goes on)’는 대사는 잠시의 망각을 꾸짖듯이 수시로 찾아온다. 삶의 폭력적 단절(벤야만)이나 묵시종말론적 청산(바울)은 인간의 종교적 환상에 스며드는 단골 메뉴이지만, 현실은 현실 속에서만 변화한다. 그 변화의 출발은 머리카락은 일없이 떨어 진다는 것’을 직시하고, 그리고 무차별 · 부분별하게 작동하는 중력 같은 삶 속으로 말을 건네는 일이다. 환상은 도착(佳關을 낳는 법이지만, 지혜는 삶에 착실(着實)하게 끔 우리의 몸을 되돌려 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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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민 (<영화인문학>(글항아리 2008), <동무론> 3부작한겨레출판, 2008-2011) 등, 단행본 26권을 상재 하였고, 지난 20여년 간〈장미와 주판)〈한국 인문학 연구회) <금시정>〈문우안> 등 인문학술공동체에 지속적으로 간여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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